20세기에는 최우량주였지만 21세기에는 상장조차 폐지되어 사어가 된 ‘좌파’와 ‘비판’, 그리고 20세기에는 일종의 ‘악의 꽃’이었지만 21세기에는 우리를 너무나 전일적으로 지배해 우상숭배의 대상이 된 ‘자본.’ 이제 아무도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입에 올리지 않는다!
하지만 유럽에는, 다시, 죽은 유령이 떠돌고 있다. 파시즘이라는 유령이.
극우 지배의 위협을 받은 프랑스에서는 1937년의 ‘인민전선’의 신판이 재등장했지만 이탈리아에서는 신나치 정권이 집권 중이고 독일에서도 ‘하켄크로이츠’가 거리로 몰려나오고 있다. 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새의 오른쪽 날개로만 날아온 지난 40년 이후, 20세기의 온갖 죽은 유령들이 유럽을 배회 중이다.
이제 21세기에 죽어 유령이, 사어가 된 ‘좌파’에 대해 ‘우울의 변증법’을 실천적으로 고민할 때이다. 미국의 ‘앵그리 화이트’는 일종의 민족주의를 정치적 분출구로 삼키고 있지만 그것은 미국 중산층의 몰락을 상징한다. 유럽의 ‘난민’ 파시즘 또한 값싼 노동력만 착취하고 정치적 권리는 박탈하려는 ‘붕괴된 자본주의’의 망상일 뿐이다. ‘평등’을 핵심 의제로 하는 ‘좌파’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재사유해야 하는 소이이다.
트럼프 등의 연설문의 몇몇 구절은 ‘Lebensraum’, 월경 난민=기생충, 난민 수용소 수용과 추방 등 저 나치 시대의 핵심적인 정치적 수사를 거의 그대로 빼어 닮은 듯하다. 디지털화와 글로벌화 등 자본의 내적 운동에 의해 빚어진 국내의 혼란(‘앵그리 화이트’)을 전부 외부화, 외부 민족 원인화하는 중이다.
그리하여 사회는 깊은 우울증depression에 빠져 있다. 이럴 때일수록 ‘우울의 변증법’이 요청되는데, 그것은 칸트의 ‘비판Kritik’, 후설의 ‘판단중지epoche’, 하이데거의 ‘탈구축Dekonstruktion, 벤야민의 ‘정지의 변증법’에 해당된다. 즉 역사를 멈추어 세우고 과거의 패배를 숙고하고, 패배의 원인을 성찰하되, 자본에 굴복하지 않는 것이 그것이다.
‘좌파’에 대한 솔직하고 용기 있는 성찰 및 반성을! 우울증에 빠진 시대에 ‘우울의 변증법’을 - 뒤러의 〈우울Melancholia〉에서 벤야민의 ‘역사의 천사’로
테러와의 전쟁부터 시작된 21세기는 ‘신냉전’에 이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열전을 목격 중이다. 팬데믹과 함께 진정으로 시작된 듯한 글로벌화는 기후위기로 전 인류의 운명을 하나로 묶고 있다. 이와 같은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해 인간의 응전력을 응집한다고 할 수 있는 ‘정치’는 새로움보다는 낡음을, 즉 퇴행의 행태를 보이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새로 등장하고 있는 과거의 유령, 네오파시즘의 경우가 그렇다.
소위 4차산업혁명은 드디어(!) 인공지능의 개발로 진정한 ‘혁명’ 단계로 진입하는 듯하지만 이 혁명의 주인공이어야 할 MZ세대는 중국의 경우 탕핑족, 한국의 경우 5포세대로 불린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제와 사회 현실 사이에서 중국이나 한국이나 ‘정치’는 권력 다툼 이상을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어디서도 마음 둘 곳을, 심리적 위안처를 찾지 못하는 대중은 유럽에서는 네오파시즘에 의지하거나 우울증을 안고 지내거나 한다. 아니면 ‘상담’에 의지하거나 ‘개딸’ 등의 정치적 팬덤에 몰두하곤 한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상상, 정치적 패러다임의 구상이 너무나 절실하게 요구되는 시대이다. 그것과 관련해 우리는 지난 1989년의 사회주의 몰락 이후 전 세계가 거의 ‘자본’이라는 한쪽 날개로만 비행해왔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는데, 그것의 가장 전형적이고 부정적인 후과 중 하나를 ‘민주주의 국가’의 앵그리 화이트 등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정치적 상상과 관련해서는 당연히 양쪽 날개로 나는 새를 복원해야 할 것이며, 그것은 ‘좌파’에 대한 솔직하고 용기 있는 성찰 및 반성과 결부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그와 관련해 어떤 ‘당파성’에도 기울지 않은 채 근대의 ‘좌파’ 문화의 부상과 성장과 몰락을 객관적으로 살펴본다. 특히 빼어난 벤야민 학자이자 정치적으로는 트로츠키주의자지만 그것은 어떤 편견이나 왜곡과도 무관하다. 오히려 벤야민과 트로츠키라는, ‘좌파’ 문화 내부의 ‘패배자’ 입장에서, 20세기의 무수한 인간의 열정을 동원했지만 도저히 말도 되지 않게 몰락해버린 ‘사회주의’ 역사를 회고하는 그의 입장은, 이제 좌파에 대해서도 ‘보편타당한’ 역사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느낌을 주기까지 한다. 가령 그가 주장하는 ‘우울적 태도’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과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고, 적 앞에 굴복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 그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반드시 새로운 형태, 미지의 경로를 택하라는 의식과 함께 말이다. 패배자의 시선은 항상 비판적이다.”
뒤러의 판화 〈우울〉은 그와 같은 태도를 하나의 그림으로 압축해서 보여주는데, 그와 같은 입장과 태도로 자본을 ‘정지’시키자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리하여 현재의 자본이 어떠한 ‘성좌’를 그리고 있는지를 새롭게 조망하고, 좌파의 ‘평등’의 프로젝트를 21세기에 맞게 새롭게 구상하자는 것이다.
우파적ㆍ문화적 벤야민을 좌파적ㆍ정치적 벤야민으로!
‘좌파’의 21세기적 복원과 관련해 저자가 가장 공을 들여 논의하는 저자 중 하나는 벤야민이다. 저자는 벤야민-아도르노 왕복 서한집 불어본 편역자로 유명한데, 본서 6장으로 실린 ‘아도르노와 벤야민’을 서문으로 실었다가 아도르노 유족의 항의로 삭제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이 장을 일독한다면 단지 벤야민-아도르노의 개인적 관계뿐만 아니라 벤야민을 둘러싼 지적 ㆍ 사회적 상황에 대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벤야민과 관련해서는 숄렘과 관련한 유대주의적 해석 그리고 아도르노와 관련된 프랑크푸르트학파적 해석이 두 가지 주류를 형성해왔지만 저자 주장에 따르면 ‘좌파정치의 실패’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읽을 때야 비로소 ‘역사철학 테제’는, 따라서 ‘벤야민’은 온전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아우라(의 상실), 기술복제, 산보자 등 패배한 ‘부르주아’ 중심으로 벤야민을 읽어왔지만, 저자에 따르면 ‘역사의 패배자’라는 관점에서만 벤야민을 올바로 읽을 수 있다. 벤야민의 ‘패자’는 공식 마르크스주의의 (승리하는, 역사의 주인공) ‘노동자’와도 또 다르다. 아도르노가 벤야민 글에 대한 무수한 표절을 감추고, 벤야민을 좌파, 가령 브레히트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한 것은, 단지 부도덕한 개인적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상적 대결 속에 있었음을 저자 글은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하여 아직도 ‘아도르노-벤야민 간의 우정’ 운운하는 논의가 주류를 이루는 한국의 벤야민 수용사에서 저자 글은 지적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가십’이나 ‘스캔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 사상의 본질, 더 나아가서는 20세기 역사이해와 관련해서도 핵심적인 의미를 가질 것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오징어 개임〉과 MZ세대의 농담에 대한 ‘좌파적 독해’ 시도
본서에는 또한 〈왜 자본가 오일남은 사회주의와, MZ세대는 자본과 ‘헤어질 결심’을 하지 못할까?〉라는 제목의 긴 역자 보론이 붙어 있다. 본 역서는 기본적으로 역사서이기 때문에 다분히 회고적이다. 따라서 저자가 주장하는 ‘좌파’의 복원 가능성을 21세기 현실에 적용 가능한지를 살펴보기 위해 긴 보론이 붙게 되었다. 마침 한국 사회에서도 소위 386세대를 중심으로 ‘진보’ 논쟁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상황도 저자의 주장의 유의미성을 따져볼 것을 촉구하고 있기도 하다.
역자는 자본과 좌파, 비판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21세기에 사어가 되었지만 또한 각기 다른 이유에서 21세기에 ‘귀환’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자본의 귀환과 관련해서는 〈오징어 게임〉의 오일남이 사회주의적 가치들에 호소하는 모습을 통해 어떻게 그것이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지를, 역설적으로,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가장 탈역사적이고 탈정치적이라는 MZ세대의 ‘라테’ 개그 또한 ‘자본-좌파’라는 틀을 통할 때야 비로소 알‘레테’이아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