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늘색 가위
객관적 상관물을 찾는 것은 문학작품을 감상하고 이해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백석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에 등장하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나 이청준 단편소설 「눈길」에 등장하는 치자나무 같은 것들이 대표적인 객관적 상관물이다. 독자들은 갈매나무나 치자나무에 대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고 하는 정서와 생각에 다가갈 수 있다. 이번 시집에서 눈에 띄는 객관적 상관물이라면 단연 ‘하늘색 가위’다. 시 「하늘색 가위」 에 등장하는 이 사물은 작중 화자가 잃어버린 물건이자 화자의 당고마기고모가 애지중지 하던 물건이다. 시는 화자가 잃어버린 가위를 찾으러 집안 여기저기, 동네 구석구석을 살피던 중 하늘색 가위를 찾는 것인지 그 가위를 아끼던 당고마기고모를 찾는 것인지 모호해지는 지점에서 광활해진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사물이 상징적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존재의 차원으로 비상할 때, 일평생 교차하며 노동한 가위질과 “맨발에 슬리퍼를 신은 채 어딜 헤매고” 있을 당고마기고모의 삶이 겹쳐진다. 하늘색 가위의 가위질은 당고마기고모의 고단한 걸음걸음과 닮았다.
■ 필립스 다리미
그리고 다리미가 있다. 「필립스 다리미」에서 다림질하는 일상적 순간은 어느새 바다 위에 배가 떠가고 파도가 이는 비일상적 풍경으로 바뀐다. 손에 쥐고 다림질하는 다리미는 바다 위를 떠가는 배가 되고, 다리미가 뿜어내는 스팀은 파도치며 일어나는 거품이 된다.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마다 펴지는 옷감들의 주름. 주름의 파도를 옷감들이 줍는다. 이제 다림질하는 평범한 순간들은 다만 옷에 남겨진 주름을 펴는 것이 아니라 옷에 새겨진 시간을 펴는 행위가 된다. 시간을 편다는 것은 흠결 없는 시간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옷감 위를 다리미가 지나갈 때 펴지는 것은 린넨이나 실크의 주름이지만 그 실체는 시간의 주름 속에 감춰진 기억들이다.
■ 시의 늪을 벗어나
책의 시작을 알리는 첫 페이지에는 시인이 쓴 서문, 즉 자서가 있다. 이 시집의 자서에서 강은교 시인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문장을 쓴다. “시여, 달아나라, 시여, 떠나라, 시의 늪들을./ 그때 시는 비로소 일어서리니.” 시에 대한 결심인 동시에 인생에 대한 결심이라고 해도 오독은 아닐 것이다. 인생이여, 달아나라, 떠나라, 인생의 늪들을. 그때 인생은 비로소 일어서리니. 일평생 시로 살아온 시인이 시에 대해 하는 단 한마디 말은 시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미래와 환상으로부터 달아나라는 것, 그때 비로소 미래도 환상도, 말하자면 우리가 기다리는 인생이 우리를 향해 돌아볼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