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고 한 가지만은 확신에 차서 말할 수 있다. 페미니스트 SF 작가들의 소설적 상상력에 불이 붙는다.
-권김현영(여성학자)
“아직은 괜찮다고, 우리는 더 괜찮을 수 있다고”
자유를 열망하는 여성들에게 건네는 명랑하고 다정한 실험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은 총 세 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 ‘레이디스’는 소도시 ‘영청’에 사는 중장년 여자들의 일상과 삶의 고민을 들여다본다. 여성 코미디언 출신 노보금은 은퇴 후 방송국에서 최대한 먼 곳을 찾다 영청에 정착해 2년째 거주 중이다. 그는 일주일에 세 번, 저녁마다 시장 광장에 울려 퍼지는 댄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시니어 여성들을 목격한다. “홀로 고요하게 지내고 싶”(p. 16)어서 거처를 옮겼으므로 보금은 함께 춤추자는 이웃의 권유를 한사코 거절한다. 그러다 결국 이웃 주민 성만옥, 자연주의 소모임인 ‘들쭉’ 대표 마종은과 함께, 소음에 거세게 항의하는 빌라 3층 여자를 찾아가 양해를 구하게 되고, 이를 계기로 ‘들쭉’의 일원이자 이름의 끝 자를 따 만든 ‘금은옥 자매’의 맏언니가 된다.
소설 속 에코 페미니즘 계열의 비영리 여성 소모임인 들쭉의 회원들은 여성과 소외 계층,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활동에 앞장서면서 자신의 내면을 읽고 스스로를 지키는 훈련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그러나 들쭉의 대표로서 관리와 홍보 업무까지 맡고 있는 마종은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인 듯 보이지만 사실 “언제나 다리 높이가 맞지 않는 의자에 앉은 기분”(p. 40)으로 살아간다. 과거 유학 중이던 아들이 결혼하기 위해 학업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아직까지 손주를 보지 못했고, 남편과 아들 내외는 한집에 살고 있어도 각자 일하는 시간이 달라 겸상조차 하기 힘들며, 자기주장이 강한 며느리 유구희와 제멋대로인 아들의 비위를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카페 ‘만춘’에서 일하는 시니어 바리스타 성만옥 역시 남편이 있지만 남편이 함께 일하던 공장에 불을 지르는 장면을 목격한 후로 별거 중이고, 딸 고지나는 그런 만옥을 원망하는 신산한 삶을 살고 있다. “불을 지르고 싶은 사람과는 살 수 있어도 불을 지른 사람과는 살 수 없”기에 결정한 일이지만 그의 가슴 한구석에는 남편에 대한 깊은 원망과 상처가 깊다.
만옥의 딸 지나 역시 남성과 행복하지 않은 연애를 하며 내면의 갈등을 겪는다. 남자친구가 원하는 것을 기어이 들어줘야 하고 그의 압박에 순응하며 감정을 공감받지도 못하는 연애를 지속해야 할지 망설이던 때, 광고판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p. 75).
“저기, 선생님, 체력이 정말 좋아질 수 있나요? 진짜 젊어지는 게 맞아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레테타는 단순한 미용 시술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근력, 유연성, 민첩성, 지구력, 순발력 모두 완경기 이전으로, 아니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수준으로 강해질 수 있죠.”
“사람 뼈가 어떻게 강철처럼 튼튼해질 수 있어요?”
“우리가 흔히 접했던 임플란트와 인공관절 수술이 비약적으로 발전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나노봇 의료 기술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수술이에요. 게다가 에리카늄을 능가하는 신소재 아크라늄은 인체의 골밀도 상태와 흡사하고 부작용이 거의 없죠.”
“왜 육십대, 칠십대 여성만 대상인가요?”
“완경 이후 쇠약해진 신체에 최적화된 치료니까요.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 말 그대로 여성분들에게 시간을 돌려드리는 수술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시간을 누리시라고요.” (pp. 81~82)
2부 ‘테이크’에서는 레테타 수술이 영청에 상륙한다. 수술 후 부작용에 대한 우려, 비판적인 사회의 시선, 레테타 반대 시위 집회로 어수선한 가운데 수술을 받기로 결심하는 노보금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무료 임상 시험 첫 시범지가 된 영청 시내 구석구석에 혈관과 관절을 바꿔주는 레테타 홍보 전단지가 배포되고, 회춘을 너머 초인이 되는 것은 물론 무혈 월경까지 거론되면서 레테타 수술은 국민적 화두가 된다. 이 혼란 속에서도 수술을 받은 여성과 받지 않은 여성은 서로가 어떤 마음으로 수술 여부를 선택했는지 이해한다. 남성과 가족 또는 업무적으로 얽혀 지내다 저마다의 아픔을 얻고 늙어간 사람들이므로, 금은옥 자매와 들쭉 회원들을 비롯한 영청시 여성들은 서로를 응원하고 또 지킨다.
3부 ‘유어 타임’에서는 레테타 수술을 받은 여성이 ‘야간 자율 수색대(야자수)’로 활동하는 등 초인이 된 이후의 세계가 펼쳐진다. 야자수의 임무는 밤의 시내를 순찰하며 위험에 빠진 사람이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불법 주차 차량을 번쩍 들어서 다른 곳으로 옮기는가 하면, 취객 남성을 가뿐히 들어 고깔 모양 주차 금지 표지판 안에 넣어버리기도 하는 그들은 뼈가 부러질 정도의 충격에도 끄떡없다. 이 세계에서 여성들은 새롭게 주어진 강력한 힘 못지않게 단단한 연대를 통해 각자의 삶을 불행에서 행복 쪽으로 밀어 보낸다.
『레이디스, 테이크 유어 타임』은 단지 여성적 관점에서 성차별의 현주소만 다루는 소설이 아니다. 레테타라는 상상력을 빌려 여성에게 완벽한 자유를 부여하는 실험이고, 영청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견고한 여성 연대를 구축해 나이 들며 잃어버리기 쉬운 사랑과 온기를 복원하는 이야기다. 자칫 무거울 수 있는 소재임에도 그동안 발표한 작품 중 “가장 밝고 유쾌”하게 풀어냈다는 작가의 말처럼, 한계 속에 놓인 모두에게 따뜻한 용기와 긍정의 가능성을 선물한 레테타 수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책은 독자에게 밝고 유쾌한 위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