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민이 쏘아올린 이 지적이고 퀴어한 불꽃놀이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_심진경(문학평론가)
‘발견되기 위한 비밀’들을 촉감하는 손길
퀴어의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내딛는 발걸음
『퀴어 (포)에티카』는 총 5부로 구성되었다.
1부 ‘the L(esbian) word’는 퀴어 소설 중에서도 레즈비언이 등장하거나 레즈비언으로 ‘읽을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작품을 다룬다.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비약적으로 증가하고 또 조명된 여성-서사에서, 여성과 여성 간의 관계성을 연대와 우애로 축소 독해하지 않으며, 이성애 제도와 문화를 탈주하고 초과하는 퀴어한 시선으로 읽어낸 작품/주제론을 배치했다. 새로운 담론의 축복 속에서 오정희의 초기작을 퀴어하게 다시 읽어내는 「괴괴한 노랑의 사랑: 레즈비언 성장기」는 고전이 탄생하는 한 원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선사한다. 작가가 각별한 애정을 가진 김멜라의 두 단편소설을 통해서는 “알 수 없음이야말로 퀴어의 자연”이라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차이들이야말로”(「몸짓의 진화」, 116쪽) 퀴어함이라는 사실을, 단지 섹슈얼리티의 정의에 국한되지 않는 퀴어의 스펙트럼을 촉감할 수 있다.
2부 ‘퀴어 포 에티카(Queer for Ethica)’는 가장 최근에 발표한 글들을 모은 만큼 그 열기가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책에서도 가장 문제적이고 도발적인 평문을 담은 2부에서는 비평 그 자체의 시선을 퀴어화하는 작업과 더불어 이미 합의된 ‘도덕을 빙자한 윤리’가 아닌, 개별 주체들이 문학 속에서 ‘스스로 생성해내는 자기 윤리’의 면모들을 발견하고자 한다. 2020년에 벌어진 오토픽션과 윤리의 문제를 전면 재검토하는 「퀴어 일인칭을 위한 변론: 오토픽션과 문학의 윤리성에 관하여」는 ‘재현의 윤리’에 관한 가장 현재적이고도 심도 깊은 한 응답을 만날 수 있기에 각별한 주목을 요한다. 한편 비평가 저 자신마저 심문하는 「가장 음험한 가장」에서는 ‘퀴어적 직시’에는 성역이 존재하지 않으며 “새로운 것을 규범화하여 제 몸을 강화하려는 욕망 속에서 자신에게 유리하고 안전한 자질로 환원하지 않고 정직하게 견인해야 한다”(248쪽)는 서늘한 결기를 목도한다.
퀴어함(queerness)은 단지 개인의 섹슈얼리티의 벡터-정체성의 표지로만 구성되지 않는다. 다르게 말하면, 스스로를 퀴어로 정체화한 개인의 모든 일상적 수행이 퀴어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또 한번 비틀자면, 퀴어 정체성을 갖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여 퀴어한 삶을 영위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성애자들도 퀴어할 수 있다. 가령 이성애자의 BDSM 섹스는 어떤가? 또는 반대로 커밍아웃한 보수당의 정치인의 행보는 어떤가? 필자를 포함하여 저간의 퀴어 비평이 퀴어로서의 성 정체성에서 출발하는 인식론이 귀납해내는 결과를 짚어왔다면 이제는 행위 이후의 존재론에서 연유하는 사유로 나아가야 할 때다. _「포르셰를 모는 레즈비언과 윤석열을 지지하는 게이에 관하여」(146쪽)
3부 ‘퀴어 포에티카(Queer Poetica)’에는 상대적으로 퀴어한 읽기의 수행이 활발하지 않았던 시 장르에서 퀴어성을 짚어내는 글들을 모았다. 신이인의 시를 경유하여 자기혐오로 물화하거나 내면화하지 않는 ‘수치’는 역으로 ‘자랑’이 된다는 감동적인 결론을 도출해내는 한편, 황인찬의 시를 통해 시와 서정, 그리고 퀴어가 만나 촉발하는 ‘새로운 서정’을 읽어내는 작업으로 하여금 오히려 시에서 더욱 다양하게 드러나는 정치성을 타진한다. 김선오의 시에서 젠더 이분법으로부터 탈주하는 논바이너리 주체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로운 사랑의 지평/가능성을 발견하는 「나를 제외한 너의 전체」, 최재원의 시를 양자역학으로 읽어내는 「사랑의 도착(perversion), 그리고 도착(arrival)」 역시 전승민 특유의 ‘퀴어 렌즈’를 만끽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4부 ‘시대의 엔트로피와 네겐트로피’에서는 동시대 한국소설이 내어놓는 다채로운 조각들을 통해 결코 하나로 통칭/분석될 수 없는, 그러나 문학과 사회가 순환하며 자아내는 시대의 기분을 감각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박상영, 장류진, 송지현 소설에서 발견되는 청년 세대의 계급성을 다루는 「‘요즘’ 청년들의 트릴레마」에서는 “서로 다른 불안을 딛고 그 위에서 각자 고유한 생의 무늬를 만들어가는 시간의 단면”(372쪽)을 읽어낸다. 특히 「혁명의 투시도」는 텍스트와 현실을 넘나드는 이미상의 소설을 통해 마찬가지로 문학장 안팎으로 역동하는 동시대 페미니즘을 살피기에 더할 나위 없는 글이다. 더불어 온갖 종류의 악과 폭력이 난무한 지금 이 시대에 긴요한 글인 「인간은 박해받는 자의 얼굴에서 태어난다」는 피해와 가해의 이분법 너머 구제와 정화를 제안하는 곡진한 메시지를 담았다.
그러므로 아픔의 기억을 무사히 과거 시제로 만들기 위해 폭력은 공공의 영역에서 결코 잊히지 말아야 하고, 피해자가 자기혐오와 자책의 늪에 갇히지 않기 위한 애도, 그리고 망각을 위한 분리의 사적 장치와 제의가 필요하다. ‘나’는 어디까지나 타자와의 충돌로 그와 연루되며 발생하는 관계성 안에서 구성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폭력의 발생이 타자에 대한 책임감, 그 윤리적 요구의 각성을 다소 잔인하게 견인하고 있지만, 레비나스의 말대로 우리는 동시에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역으로 동일한 박해자, 가해자가 되지 않게 하는 얼굴을 가진 인간이 된다. 우리가 ‘잊지 말자’고 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반복을 막기 위해서가 아닌가. 자기방어를 근거로 삼는 또다른 폭력으로 응수하는 보복은 정당한가? 그렇기에 폭력을 끝내는 인간의 얼굴은 바로 박해받은 자의 얼굴로부터 태어난다. _「인간은 박해받는 자의 얼굴에서 태어난다」(431쪽)
그리하여 5부 ‘회복의 인간학’에서는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작품들을 다룬다. 부러 치유나 치료가 아닌 ‘회복’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이유는 회복이야말로 자신의 몸으로만 해낼 수 있는 지극의 자기 구원 작업이기 때문일 터. 폭력의 문제를 언어와 결부하여 인간 심연을 탐문해온 한강의 소설과 시를 집중 조명하는 일은 거의 필연적이다. “우리를 가장 괴롭게 하는 그 무엇이 실은 우리의 생을 가장 아름답게 만드는 것”임을, “그래서 우리에게는 고통의 윤리학이 필요하다”(「색(色)으로 읽는 고통의 윤리학: 삶을 껴안은 죽음으로 나아가기」, 438쪽)는 역설에 설득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전승민의 비평에서 언뜻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바늘 끝만한 상처 속에 감춰진 맨홀 구멍만큼의 고통을 발견”하고 “종종 냉철하고 객관적인 시각보다는 따뜻하고 연민에 가득찬 촉각을 동원하는 이유”(심진경)를 우리는 ‘회복’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가닿을 수 있다. 작가는 “회복은 상처를 소거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을 흉터로 만들어 끝내 자신만의 무늬로 만드는 작업”(「책머리에」)이라고 말한다. 이는 평론가 전승민이 궁극적으로 도약하고자 하는 지점이자 비평의 다른 얼굴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시작의 시작으로 되돌아가 다음의 문장을 복기해본다. “문학은 사랑입니다.”(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소감)
‘촉각 비평’은, 사랑의 비평가는, 『퀴어 (포)에티카』는 이렇게 탄생했다.
표면과 이면,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더듬어 만지고 듣는 일, 비평 사이에는 탄성이 작용한다. 둘 사이에 작용하는 유체역학에 의해 비평이 텍스트를 만날 때마다 그것의 탄성계수는 변화한다. 작품의 물성은 작품마다 모두 다르고, 동일한 작품이라 할지라도 비평이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각도로 그것에 다가가느냐에 따라 관계의 양상은 달라진다. 비평은 시가 언어로 새긴 음반을 재생하는 퍼포먼스의 수행이다. 시의 응시 불가능성 속에서, 죽어버린 언어를 붙들고 그 죽은 말들의 읽기를 통해 삶을 소생시키는 부활의 작업이다. 시가 매일 아침마다 참혹하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기도 하다. _「음악이 잠든 문서들」(58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