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부터 대한제국까지,
한 나라의 왕부터 관청의 실무자까지
‘협상’을 무기로 각자의 무대에서 활약한 주인공들을 만나다
예로부터 ‘협상’은 약자의 무기였다. 충분히 강하지 않기에 오만할 수 없었고, 끊임없이 정세를 파악하고 대외 전략을 고민하며 그에 맞는 인재를 등용하여 선견지명과 순발력으로 맞서야 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장수왕이나 김춘추(태종무열왕) 같은 왕족, 서희나 최명길 같은 문관은 물론이고, 고을 아전을 하다가 나랏일의 최전선에 서게 된 이예, 승려의 신분으로 전쟁에서 장수 못지않은 공을 세운 사명대사, 외국인 출신 중 처음으로 우리나라 외교관으로 활약한 설장수, 개화기에 외교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에 근무하다가 나중에는 임시정부로 망명해 독립운동에 투신한 김가진에 이르기까지, 이 각양각색의 ‘외교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와 지위 등 한계 속에서도 각자의 협상 능력을 발휘해 나라를 지켰다.
책은 이들 8명의 이야기를 풍부한 사료를 바탕으로 박진감 넘치는 사극처럼 구성해 냈다. 청소년 독자는 이 책을 읽으며 고구려부터 대한제국까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흥망성쇠를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절망 속에서도 살길을 찾는 강한 의지와, 약자의 지혜, 딜레마를 통한 사고 훈련 또한 접할 수 있다.
강자들과 똑같이 거리를 두며 특별한 지위를 차지한 장수왕,
나라의 존속을 위해 자존심 버린 김춘추,
절망의 남한산성에서 끝내 살길을 연 최명길…
‘사대주의’로 싸잡아 비난할 수 없는 벼랑 끝 생존술
청소년이 교과서에서 국사를 배울 때 외교와 관련해 가장 많이 접하는 단어가 바로 ‘사대주의’일 것이다. ‘약자가 강자를 섬긴다’는 사전적 의미만 보더라도 ‘사대’는 자연스러운 전략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후세의 우리가 당시 특정 인물을 ‘사대주의자’로 묘사할 때 거기에는 어느 정도 비난이 담기곤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대주의자’로 낙인찍힌 몇몇 인물들을 불러 내 훨씬 더 다층적인 인간으로 되살려 낸다. 이를테면 고구려 장수왕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중국 대륙 각 나라에 ‘조공’을 바쳤다는 사실로 채워져 있는데, ‘정복왕’으로 불릴 만큼 나라의 영토를 넓혔던 그의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에 비하면 보잘것없이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5세기경 동아시아에서 압도적으로 강성했던 북위와 대륙 남쪽의 강한 왕조들 사이에서 장수왕은 어느 쪽에도 완전히 기울지 않고 화려한 외교전을 펼치며 국제적 균형을 유지해 냈기 때문이다.
당나라의 군사력을 빌려 백제를 멸망시키고 통일신라를 이룩한 김춘추에 대해서도, 민족사학자 신채호를 비롯한 많은 애국자들은 매우 날선 비판을 가해 왔다. 저자는 당시 신라의 존속을 어깨에 짊어지고 동북아시아를 종횡무진했던 김춘추의 행적을 되짚어 보여 주며 외교의 여러 측면을 깊이 생각해 보게 한다.
우리는 흔히 ‘애국’이라고 하면 ‘모’ 아니면 ‘도’, 적에게 머리를 숙일 바에야 차라리 죽음을 선택했던 이들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그러한 애국의 세계에는 외교도 협상도 전략도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외교 없이 존속할 수 있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다.
물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으며 후세의 여러 평가가 뒤따르겠지만,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이른바 ‘양쪽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당장의 위기를 극복하려 한 이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한 것(나라의 존속과 백성의 생명)은 저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놀라운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