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김정희 선생 출생 시 조선의 내외정세는 이미 불꽃 튀는 격동기였다. 서구열강이 쉴 새 없이 개화의 깃발을 펄럭이는데도 오로지 왕만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던 때였다. 이른 봄철 산비둘기 울음 길동무 삼아 화전민으로 전락한 백성들이 귀엽고 예쁜 그들의 어린 것들을 생으로 굶겨 죽이고는 반실성하여 헛소리하다 뒤따라 죽기 예사인 시절이었다.
그나마 제왕다운 풍모가 강하던 정조가 급서하자 국운이 쇠퇴 일변도로 기울기 시작했다. 나라를 움직이는 조정신료들은 당쟁에 급급한 나머지 국가의 근본인 백성들 살림살이를 걱정할 겨를이 없었다. 순조 등극 후부터 대왕대비가 수렴청정하는 조선왕조의 부귀는 온통 권신權臣들 차지였다. 왕실과 세도문중, 양반, 심지어 고을 아전들까지 합세하여 백성 고혈 빨아먹으면서도 소득 산업인 상업을 가장 천시하여 실질을 저버렸다. 반상班常이 극심한 양반사회에서 신분제도는 엄격하였고 형벌은 무거웠다. 사회지도층은 소득 없이 공리공론을 일삼아 하루도 끊일 날 없는 당쟁의 폐해로 날로 텅 빈 국고의 한숨이 퍼져나갔다.
이 글은 당리당략에 치우쳐 변화와 개방, 개혁을 등한시하여 혼란하였던 조선후기를 시대상으로 하여 정치가와 예술인으로서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추사를 주인공으로 쓴 시집이다. 예산에서 태어나 한양 월성위 문중을 이어받은 추사의 삶을 조망한 글이다. 운명이라 해야 하나? 추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 불렀지만 추사는 윤상도 상소와 관련이 없었다. 그 어떤 죄도 없었다. 죄가 있다면 세도정치였다. 추사를 고문하며 36대의 곤장을 친 형장과 제주도 위리안치 및 북청 유배는 당시 권력층의 몫이어야 옳다. 그러나 이는 끝내 혁파되지 않았다.
이 폐단의 지속은 결국 일제의 조선침략으로 귀결되었지만, 세도정치는 당대 조선국에서 이미 학예의 최고 경지에 이르렀던 추사에게 엄청난 불운이었다. 허나 불후의 업적인 세한도와 추사체 정립 등의 빛나는 예술세계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불운이 모태가 되었다. 이 시집은 그러한 추사의 궤적만을 살펴 쓴 시집이다. 다음권에서 추사의 진면목에 해당하는 학문의 위대한 성취 및 추사체와 추사의 예술세계를 살펴 완결지을 것임을 밝힌다.
모쪼록 작은 이 시집이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시, 서, 화, 경학, 감상, 금석학, 고증학, 불교학의 새 역사를 개척한 추사 김정희 선생을 기리게 되길 빈다. 더하여 일대의 통유通儒, 우리 온 겨레의 혼불이신 추사 김정희 선생을 만나 뵙는 글이 되길 염원한다.
2024. 5.
산정 신익선 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