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6년 만에 내놓는 안준원 본격 첫 소설집!
“이것은 나의 너에게,
반쪽이 아닌 온전한 너에게 보내는 내 마지막 편지야”
안준원의 소설집 『제인에게』가 현대문학에서 출간되었다. “감각적인 장면과 날렵한 전개”(박형서), “인물과 장면을 각인시키는 대사”(백지은)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으며 2018년 『현대문학』 신인추천으로 등단한 안준원이 6년 만에 내놓는 본격 첫 소설집이다. 이번 소설집에는 등단작 「백희」를 비롯해 표제작 「제인에게」, 미발표작 「반딧불이 사라지면」 등 6년이라는 시간을 톺아볼 수 있는 여덟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머릿속으로 오가며 “모든 일들이 서로 얽혀 있다는 느낌”을 받았으며 “상관관계를 해석할 수 없을 그 얽힘” 속에 “유일하게 해석 가능한” 것이 사람들을 향한 “마음”이라고 당선소감에서 밝혔던 작가는, 『제인에게』에 수록된 여덟 편의 이야기를 통해 바로 이 ‘사람’들과 ‘삶’을 이해해보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연극과 글쓰기라는 매체를 통해 기꺼이 그 삶을 직접 살아보고자 하는 시도를 소설로 담아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본 뒤 그를 이해하게 되었을 때, 그 존재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결국 이 이야기들은 사람을 온전히 이해함으로써 온전히 사랑해보고자 하는 다짐이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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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는 그 자리에」의 ‘나’는 졸업을 앞두고 사회가 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는 데 반감을 느끼던 중 ‘연극 오퍼레이터’ 제의가 들어오자 냉큼 수락한다. 연극을 만드는 프로들 사이에서 자신이 “살아 있는 세계”에 속하게 됐다고 생각하며 그 생동감에 젖어 있었으나 어느 순간 연극판의 모든 것이 지지부진하고 부질없는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진다. 결국 연극판을 떠나 글을 쓰기 시작하지만 ‘나’가 쓰는 글은 ‘희곡’이 아닌 ‘소설’이다. “혼자 하는 작업처럼 느껴지지 않”는 희곡과 달리, 소설은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장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연극과 소설이 사람과 삶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삶이 (연극) 무대라면 삶의 이야기는 소설이”라는 작가의 생각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환한 조명 아래 우리는」은 「은행나무는 그 자리에」의 극단 배우 중 한 명이었던 ‘환이 형’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무대에서 연기를 하던 중 뇌동맥류가 터져 쓰러지며 연극을 떠나 있던 ‘나’(‘환이 형’. 본명 ‘김덕훈’)는 재활에 성공해 ‘수미 누나’와의 이인극으로 복귀하게 된다. ‘수미 누나’와 합을 맞추며 갈등을 겪던 중 ‘나’는 “무대 위에서 한생을 보내야 할 상대 배우가 나를 끝내 이해해주지 못하리라는 것”,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에 직면한다. 단 한 명이라도 나를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그 두려움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어 하지만, 방법이 요원하다.
표제작 「제인에게」에서는 인류가 가상 세계로 들어가 살게 된 먼 미래, 사람들은 캡슐을 통해 뇌만 전송해 지내는 P월드에서의 삶을 낙원의 삶이라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나’와 제인은 그 삶이 가짜에 불과하다며 자유지대로 향한다. 제인은 ‘나’에게 “사랑이 곧 이해고, 이해가 곧 사랑”이라고 매번 말했지만, 결국 “더 많은 것을 사랑하고자” ‘나’를 두고 집단의식의 세계인 M월드로 떠나버린다. 제인에게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나’는 M월드를 해킹하려고 시도 중인 ‘우루무치’에게 새로운 제안을 받고, 나는 그 제안을 통해 우리가 다른 시공간을 품은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방법이란 가짜라고 믿는 것조차 진짜처럼 믿는 일 정도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하는 일은 그 사람이 지나온 “온 시공간”을 포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간을 대하는 독특하고도 정교하고” 시공간에 대한 “섬뜩한 정조”(박형서)가 돋보인다는 평을 받은 바 있듯, 『제인에게』는 수많은 시간과 공간이 겹치며 형성된 또 다른 시공간에 대한 비유가 가득하다. 사랑이라는 강렬한 체험이 우리를 전혀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놓곤 하듯이, 여덟 편의 소설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은” 이 이야기들을 따라 새로운 시공간으로 뛰어드는 일은 두렵지만 무척이나 설레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 줄거리
★ 「염소」
추석 연휴를 맞아 이국의 염소 농장으로 여행을 간 ‘나’와 재희. 둘은 술김에 염소 농장의 주인인, 창의 아버지에게 아이를 갖고 싶지 않다고 털어놓게 된다. 서툰 영어로 소통한 탓에 이를 임신 중단으로 오해한 창의 아버지는 그 죄를 사해줄 ‘염소 희생제의’를 치르는데, 그다음 날 마을의 샤먼이 나타나 그 제의는 잘못된 것이었으며 ‘나’에게 네 손으로 직접 염소를 잡아야 모든 것이 끝난다고 엄포를 놓는데…….
★ 「백희」
‘나’는 직장을 다니다 몸도 마음으로 잃어버린 자신을 발견하고 퇴사해 글을 쓰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3년 만에 백희가 갑작스레 찾아온다. 백희는 지난 3년간 시간을 거슬러 오르다가 미래에 자신이 될 존재를 만났고, 그 뒷모습을 쫓고 있는데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자신이 없어져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다고 털어놓는다. ‘나’는 백희에게 백희가 아꼈던 유리구슬을 건네주고 백희는 내게 자기 이야기 말고 네 이야기도 쓰라고 말해준 후 골목길로 사라진다.
★ 「제인에게」
인류가 현실을 버리고 가상으로 들어간 먼 미래. 대다수의 사람들은 캡슐 안에서 뇌만 전송해 사는 세계인 P(aradise)월드를 낙원이라고 믿고 산다. P월드에서 살다 낙원 침몰 사건을 계기로 그 바깥의 자유지대로 건너갔던 ‘나’와 제인. ‘나’가 사랑했던 제인은 사랑이란 이해이며 이해가 사랑이라는 믿음하에 진정한 사랑을 이룩하고자 ‘나’를 두고 집단의식의 세계인 M(ind)월드로 건너가버린다. 홀로 남은 ‘나’는 제인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강구하다가 도망자인 하노이를 만나고, 그를 통해 M월드를 해킹하려고 시도 중인 다른 도망자 우루무치를 알게 된다. 우루무치는 내게 ‘나’가 ‘가짜’라고 여기는 P월드에 접속해 ‘진짜’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
★ 「은행나무는 그 자리에」
과거의 ‘나’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연극 오퍼레이터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자 냉큼 수락한다. 술에 잔뜩 취해서 보낸 엠티, 경진과의 풋사랑, 김현식 노래만 부르던 낭만파 연기자 환이 형과의 인연……. 분명 생동감 넘치고 살아 있는 세계였지만, 어느 순간 ‘나’는 연극판의 모든 것이 지지부진하며 제자리걸음인 데 지쳐 그 판을 떠난다. 그리하여 현재, 다시 이들을 마주한 나는 여전히 그들이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며 문득 그 답보의 시간이 마냥 가치 없던 것이 아니라 고통을 동반하는 나이테를 늘려가는 시간이었음을 새기게 된다.
★ 「환한 조명 아래 우리는」
‘나’(「은행나무는 그 자리에」의 환이 형)는 무대에서 뇌동맥류가 터져 쓰러진 후 1년 만에 기적적으로 복귀한다. 복귀작의 제목은 「돌아온 이들을 위한 연극」. 결혼을 해서 연극판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수미 누나와의 2인극이다. 두 사람은 연극과 삶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며 좀처럼 합을 맞추지 못하지만, 결국엔 무대에서의 일들은 놀이이자 그 자체로 삶이므로 그저 최선을 다해 자신을 잊고 노는 수밖에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렇게 ‘나’와 수미 누나는 환한 조명 아래, 다시 무대에 오른다.
★ 「포터」
민수와 주희는 처음으로 함께 살게 될 집에 가구를 채우고자 포터를 사서 타고 서울과 경기 곳곳으로 중고 가구를 얻으러 다닌다. 처음엔 남쪽에서 만나 사랑을 키웠던 둘은 집값 탓에 계속 북쪽으로 쫓겨 올라가다 이번에 구한 집은 철책에 막혀 더 갈 곳이 없는 북쪽 끝. 민수는 통일이 된다면 길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갖고 주희를 포터에 태워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는 아시안 하이웨이를 달릴 상상을 한다. 주희는 그런 희망을 꿈꾸지도, 말도 안 되는 희망만 품는 삶은 살고 싶어 하지 않는데도.
★ 「코트」
나이 든 부모를 수용소로 보내는, ‘부모 유기’가 합법화된 미래. 어느 날 소위 ‘S급’으로 평가받던 허 노인이 갑작스레 자살하고, 친분이 있던 수용소 직원 ‘나’는 조사관으로서 경위를 조사하게 된다. 자살에 연관돼 있던 건 박 노인으로, 사실 아들로부터 버려진 것임에도 코트를 입고 있으면 아들이 데리러 올 것이라며 코트에 집착을 보이는 이였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책임지고 싶지 않아 제 발로 수용소에 들어온 것이었던 허 노인은 박 노인에게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을 겹쳐본다. 그러던 중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었다……. 사건의 조사를 마친 ‘나’는 그 공을 인정받아 특진을 앞두고 마지막 보초 업무를 보던 중, 수용소 밖으로 자기 부모 얼굴이 어른거리는 환상을 본다.
★ 「반딧불이 사라지면」
‘비욘드 브릿지 프로그램’을 통해 가상으로 고인과 마지막 순간을 보낼 수 있는 근미래. 효민은 프로그램 속에서 어머니와 마지막 길을 걷는다. 과거의 기억을 되짚으며 어릴 적 어머니가 불러줬던 노래 「개똥벌레」를 함께 부르고, 어머니는 효민에게 글을 쓰라고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