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몸을 가지고 나는 씁니다
당신의 얼굴, 나의 응원
예고했듯 앞서 K가 쓴 시에 기대, 그의 아픈 몸을 낱낱이 ‘해석’하고 ‘분석’했다. 쓰면서 나는 깨달은 듯하다. 임상보고서인 줄 알았는데 그가 앓고 난 뒤 쓴, 저 일련의 시에 빨려 들어가 전혀 예상치 않게 그의 새로운 시적 경향을 엿본 것 같다. 그가 ‘기후’와 ‘기분’의 양극을 오간 끝에 그 연장선상에서 약간은 뜬금없게, 나는 처음에 그것이 억지스럽다고 생각했다. ‘로션과 스킨’을 호출한다. 반복해 보겠다. “무조건 함께 있는 걸로 주세요”. 나는 이 말을 오독했던 것 같다. 앓고 난 후 무너져 내린 자신의 사고체계에 대한 시적 표현이라 생각했다. 무/조/건/ 함/께/ 있/는 걸/로 주/세/요. 그의 요구에 내 대답은 이랬다. “그러지 말고 이거 쓰세요, 로션과 스킨이 따로 있어서 그날 상태에 따라 골라 쓸 수 있어요, 결혼식에 갈 땐 로션을 장례식엔 스킨을 조금 발라 주세요”(「로션과 스킨」). 이치와 사리를 가리는 내 주문에 당신이 내린 최종 답변이다. “사실 장례와 결혼은 한 몸이에요”(「화환」, 『이야기』). 그가 쓴 시에 기대, 병적 징후에만 골몰했던 내게, 급습하듯 던진 그의 말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에둘렀지만 그는 자신의 아픈 몸을 재료 삼아 새로 장착한 시론을 개진한 것이다. 어떤 시론들은 이렇게 불현듯 찾아온다.
자신마저 알지 못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여기까지 오게 된 건, 누구의 탓도 아니다. 그가 “감염된 심장으로 통화를 해요, 당신은 없는 사람이래요, 식은 밥처럼 조용히 살고 있어요”(「모처럼의 통화는」), 라고 쓸 때 나는 저 문장을 마음으로 읽는다. 그가 내게 한 말들이 시가 된 것이다. “아침부터” “진찰실에 앉아” 의사의 “긴 설명을 들어야 하는 일”(「아침부터」)은 얼마나 난감한가.
……
그가 “먹어 치”운 자신의 “얼굴”을 향해 말한다. “대야에 비친 자신을 사랑하세요, 다른 얼굴이 보여도 그냥 주워 사용하세요”(「이거 좋은 거예요」). 이어 그가 쓴다. “그러니 우리는 그만 제 얼굴을 찾는 게 좋겠어”(「그만해도 돼」). 이것은 자문자답인가. 여기까지 쓰고 “질문이 많아 미안해요, 그냥 헛소리라고 생각하세요”(「반쯤 있는 그」, 미발표 시), 라고 그가 혼잣말을 할 때 나 또한 그를 따라 속삭이듯 외친다. 제발 ‘헛소리’여도 좋으니 K, 당신이 당신의 얼굴을 먹지 말고 되찾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