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불편한 시조의 세계라니!
201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한 이토록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이후의 세계』가 가히 시인선 006으로 출간되었다. 이토록의 시는, 아니 시조는 가히 충격적이라 할 만하다. 정형시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토록이 다루는 시적 소재는 이질적이며, 전통 시조에 익숙한 독자의 눈엔 다소 거북하게 읽힐 수도 있다. 그 불편함이 이토록 시인이 바라는 시조의 방향이자 정형시의 ‘이후의 세계’이다. 정형시의 전복을 꿈꾸지만, 시조의 본질은 그 누구보다 철저히 지켜온 이 불편한 시집 『이후의 세계』는 분명, 기존의 시조단에 파란을 불러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 해설 엿보기
시간은 우리 몸에서 다시 자연을 읽게 한다. 신과 존재로 골몰하던 머리를 숙이게 하고, 문명의 기획에 분주했던 모든 손길을 거두게 한다. 욕망의 발걸음을 멈춰 세워 깊은 그늘 속의 불안을 응시하게 만든다. 시간의 지혜는 망각이 아니라 상기에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일상의 기대는 재빨리 충족되고, ‘약’은 순식간에 ‘독’으로 변한다. 독의 공포는 우리의 운명을 상기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그 누구도 나온 곳으로 되돌아갈 수 없기에 필연적으로 종말로서의 죽음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생의 결여였던 죽음을 부재로 완성하기 위해 결국 자연을 바라보게 된다. 인간을 지운 자연, 즉 야만이나 야생이 아닌 본래의 자연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않고no recall, 그 무엇도 반성하지 않으며no reflection, 어떤 후회도 하지 않는no regret다.
이토록의 『이후의 세계』는 시점, 혹은 기점을 중심으로 한 변화상의 기록이 아니다. 그때와 지금, 여기와 저기를 구분하여 비교하거나 차이를 유추하지 않는다. 즉, 선후와 인과의 원리를 결과에서부터 환원하지 않고 그 작용의 비의를 탐색한다. 이 관계성에는 주체와 대상의 대립과 공모가 날것 그대로 상존한다. 비약하면, ‘이후’는 이후만의 전부가 아니고 ‘세계’는 외따로 존재하는 자연의 반대 항이 아니다.
송곳니를 감추고
파리가 꽃에 왔다
위태로운 마음이 짐승을 키웠다
축축한 음순을 가진
털 달린 끈끈이주걱
분홍빛 알몸으로 수로를 가득 채운
저 색을 꽃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꽃말에 숨긴 피 냄새가 검붉게 고인 곳
날개로는 벗어날 수 없는, 늪이라는
떼어먹을 밥풀도 없는 허기 속으로
제 몸을 다 밀어 넣는 진저리를 보고 왔다
파리는 짐승 같은 식물이 되었을까
욕망의 검은 눈을 이마에 그려 넣고
날개를 윙윙거리며
내 속에서 울고 있던
- 「끈끈이주걱」 전문
육식성 식물은 상식의 경계에 위치한다. ‘끈끈이주걱’과 ‘파리’의 관계는 포식 활동이 전부다. 자연에서라면 ‘먹는 존재’와 ‘먹히는 존재’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시는 표면상 그 구분을 따르는 것 같지만, 이면에서는 첫걸음부터 분명하지 않다. 끈끈이주걱의 꽃말은 ‘발을 조심하세요’라고 한다. 경고이지만 유혹이기도 하다. “축축한 음순”은 “피 냄새가 검붉게 고인 곳”으로 묘사된다. 주체로서 ‘끈끈이주걱’은 본능에 충실하다. “분홍빛 알몸으로 수로를 가득 채”워 기다린다. ‘꽃’이거나 ‘음순’이거나 생식이라는 목표, 즉 자기 보존과 종의 보존이라는 비의는 변하지 않는다. 이와 달리 ‘파리’는 “송곳니를 감추고” 꽃을 찾아온다. 결국, “날개로는 벗어날 수 없는, 늪이라는/떼어먹을 밥풀도 없는 허기 속으로/제 몸을 다 밀어 넣는 진저리”를 보여준다. ‘파리’는 “짐승 같은 식물”이 되고 싶어 ‘끈끈이주걱’의 음모의 공모자가 된 것이다. 시인은 식물과 동물이라는 이종(계, 界)이 빚는 사건에 “위태로운 마음”의 ‘짐승’으로 기꺼이 연루된다. “욕망의 검은 눈을 이마에 그려 넣고”(끈끈이주걱) “날개를 윙윙거리며”(파리) 제 몸의 ‘진저리’를 펼쳐내고 싶은 것이다.
이처럼 이토록의 시는 격렬한 시어들이 절제된 정조 아래서 대비를 통한 종합이라는 방식으로 단단하게 배치되어 있다. 가령 1연을 보면. ‘송곳니’와 ‘꽃’, 직선과 곡선, 적의와 화의 같은 대비가 ‘위태로운 마음’이라는 제3의 형질로 수렴, 용해된다. 이 시에는 ‘분홍빛 알몸-꽃’과 ‘위태로운 마음-피’ 그리고 ‘욕망의 검은 눈-진저리’처럼 시집을 관통하는, 아니 시 세계를 구축하는 세 층위가 확연하게 드러난다. 물론 그마저도 아직은 시인이 빚어내고자 하는 ‘이후의 세계’의 역상, 혹은 귀가 덜 다듬어진 퍼즐 조각들일 뿐이다.
- 백인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