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가난은 사회적인 것
오진엽 시인의 시집에는 신산했던 가족사가 앞부분에 드러나 있다. 일단 아버지의 노쇠화와 엄마에 대한 상실 의식이 그것이다. 시인의 기억으로 아버지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손이 갈퀴가 되도록 논밭에서 뒹굴어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던 무능한”(‘시인의 말’) 사람이지만 여기서 ‘무능’은 결과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불리는 사회적 규정일 뿐이다. 시인도 말하고 있지만 아버지는 분명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손이 갈퀴가 되도록” 일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일했는데도 무능하다고 낙인찍힌 것은 아버지의 가난이 곧 사회적 가난인 것이다. 사회든 개인이든 자기 책임을 남에게 떠넘기려는 방어 기제는 상대를 ‘무능’하다고 손쉽게 규정하곤 한다.
시집의 1부는 그런 아버지에 대한 시적 화자의 간곡한 마음으로 꾸려져 있다. 드디어 쓰러지고 만 아버지는 “없이 살아도 남 앞에 평생 굽실거리지 않았던”(‘시인의 말’) 사람이지만 결국 형과 나의 학업을 위해 자신을 버린 채 “벽돌공장 일용직”으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네모반듯하게/ 일당 만 원을 찍어내”(「기적」)며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자식들이 장성해도 그 아버지는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들 딸 손자들 다 자랐어도
여든을 넘긴 아버지
밭두렁에 매여 있다
_「목줄」 부분
이런 억척스러운 아버지 상(像)이 아주 드문 것은 아니지만, 시인의 내밀한 삶의 세계로 들어가면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된다. 그것은 ‘엄마의 부재’ 때문인데, 네 살 때 떠난 엄마를 찾아 “꿈에서 엄마 찾아 삼만리를 헤매느라 혼곤”(「품」)한 날이 적잖았다. 그러니까 시적 화자의 엄마가 떠난 뒤 “홀로된 아버지/ 다섯 살 철부지 데리고/ 공단 언저리에 둥지 틀었”(「1973년 팔복동」)던 것이다. 여기서 독자들은 엄마의 떠남이 아버지의 경제적 무능 때문임을 알아챌 수 있다. 신파 같기도 하지만, 이 신파가 지난날 ‘조국 근대화’의 와중에서 벌어진 이산의 문제라고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역사적 의미가 새겨진다. 시적 화자의 정서가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이 묘하게 교차해서 형성된 것임도 읽어내기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제 그 엄마는 이 세상에 있지 않고 병든 아버지만 남았다. 하지만 「성아」라는 시에서 보듯, 시적 화자가 엄마를 만난 사실도 또 엄마의 부재도 한동안 형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형에게는 열 살 때 떠난 엄마이기에 형이 더 큰 상처를 가졌을 거라 생각됐기 때문이다. 이번 시집에서 아버지에 대한 연민보다 엄마의 부재가 더 크게 다가오는 것은, 아무래도 우리 역사가 아버지의 세상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장모님과 아내의 관계에 대해 쓰면서 제목을 ‘엄마가 있는 집’으로 한 것에서 보듯 시인에게 엄마란 존재는 단지 혈육의 차원을 넘어선 것처럼 읽힌다. 그래서 이 작품에서 시인의 무의식을 이루고 있는 엄마의 현현을 순간 읽는 것은 자연스럽다.
‘엄마의 세상’을 만든 시
가난한 ‘아버지’가 이뤄놓은 뼈대 위에서 ‘엄마’의 부재를 산 것은 비단 오진엽 시인만은 아닐 것이다. 이 서사는 우리의 근대사의 비상한 상징이기도 한데, 오직 아버지의 근면 성실만 부각되면서 아버지의 근면 성실이 엄마로 표상되는 어머니성(性)을 은폐한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시인이 이 두 존재를 대립적으로 세우지 않은 채 아버지가 이뤄놓은 뼈대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엄마의 세계를 은연중에 구축하는 장면도 눈여겨볼 만하다. 발문을 쓴 오철수 시인이 “‘엄마가 있는 집’ 같은 사회 재구성을 위하여”라고 말한 것은 이를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이다.
북한산도 통일되면 국싼잉 겨
쩌기 새댁들 보랑께
여기 산꼴짝은 사람도 절반은
물 건너온 외제랑께
땅에서 낫쓰면 다 똑가튼 겨
_「순창시장 참기름 집」 부분
그려 빠스야
니도 사람 태우고
하루 죙일 뛰댕기느라 용썼응게
어쩟끄냐
요럴 때라도 숨 좀 돌리고 쉬그랴
_「그려 빠스야」 부분
「순창시장 참기름 집」은 이번 시집의 표제작인데, 아무 물정 모르는 도시인들이 시골장에 가서 국산이네 중국산이네 따질 때 시골 할머니의 일갈을 옮겨 온 것이다. 「그려 빠스야」는 시골 버스 기사가 밥 먹고 온다고 홀연 버스를 멈춰 세운 것에 대해 탑승한 할머니가 중얼거리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이다. 어쩌면 이런 덕(德)의 세계를 그동안 부재했던 ‘엄마’라는 존재가 만든 역설일 것이다. 시인이 아버지에게는 연민을 엄마에게는 깊은 그리움을 갖게 된 것은 개인사 때문이나, 위 두 작품 및 다른 시들에서 보여주는 정경은 시인의 무의식적인 지향점이 어디인지 자신도 모르게 드러낸다.
도시인들이 시골 장에 가서 농산물을 두고 국산이니 중국산이니 나눌 때, 참기름 집 할머니는 “땅에서 낫쓰면 다 똑가튼 겨”라고 그 구별법을 허물어버린다. 자신과 또는 자기 가족만의 안녕을 꾀하는 소시민적인 것-어쩌면 아버지의 근면 성실이 만들어 놓았을지도 모를-을 여성인 어머니가 허물고 있는 모양새다. 이미 “산꼴짝은 사람도 절반은/ 물 건너온 외제”인 농촌 현실에서 중요한 것은 이것은 좋고 저것은 안 좋다는 편협한 분별심이 아니다. “땅에서 낫쓰면 다 똑가튼 겨” 같은 인식은 만물을 낳고 기르는 어머니 대지의 마음이 아니고는 도달하지 못하는 경지다.
「그려 빠스야」도 결국 같은 마음의 소산이다. 비록 그 대상은 기계 덩어리인 버스이지만, 사람의 삶과 함께 존속하는 사물에 대해 “요럴 때라도 숨 좀 돌리고 쉬그랴” 같은 할머니의 말은 버스도 사람의 삶과 진배없다는 마음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할머니의 이 말을 버스도 알아듣고 “네 발 달린 순한 짐승/ 꾸벅꾸벅 쪽잠을” 자는 풍경은, 시인이 엄마의 부재를 통해 엄마의 세계가 무엇인지 도달한 경우에 해당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