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시작은 침묵이다. 침묵 속에는 생각이 들어 있다. 말하기 전의 숱한 생각들이 교차해 가면서 일어나는 발심이 담겨져 있다. 불교 경전 금강경에‘보이는 것은 믿어서는 안되며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서도 안된다’고 하였다. 이는 결국 의미에 갇히지 말라는 말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은 의미의 태반에 대한 전쟁이라는 것이며 이는 의미를 차단하는데 목적이 있다. 곧 무언의 상태가 해탈인 것이다.침묵의 언어는 바람 소리이며 물소리다. 침묵의 언어는 내 안에 고여 있는 멍이다. 파도 멍, 물결 멍, 강물 멍, 햇살 멍. 허공 멍, 바람 멍, 풍경 멍 등 온갖 멍 때리는 행위가 뭉쳐 만든 빈터이며 허공이다. 불교에서 사용하는 공空과도 같다. 그래서 침묵의 언어는 의미가 영도에 멈춰있다. 그러기에 0도의 언어는 산문적 판단이나 의미를 거부한다. 주체와 대상을 뛰어 넘어 존재하는 언어다. 그것은 안과 밖이 없는 언어이며 돈오돈수의 경지에 서있는 언어를 말한다. 이는 진여를 찾는 구도자의 모습으로 내게온다.
화두를 붙들고 앉은 푸른 스님이
없는 문고리를 당겨 열려고 한다
화두는 삼만리는 더 달아나서
도무지 가까이 오려하지 않는다
화두는 상식이 아니다
화두는 손으로 잡을 수 있는 문고리가 아니다
정각에 닿는 문은 직선에 있지 않아
문고리를 잡아당길 수 없다
그냥 문을 떼어라
〈화두〉 전문
묵언수행 하는 승려처럼 침묵은 자기 수행이다. 말을 아껴 자신의 본래에 도달히고자 한다.
경허의 제자에는 만공, 수월, 혜월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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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허의 제자에는 만공, 수월, 혜월이 있다.
만주로 길 떠나는 수월이 만공과 마주 앉았다. 둘 사이에 놋그릇을 두고서 만공이 수월의 수행 정도를 알아 보기 위해 물었다.
“비어 있는 놋그릇과 무엇을 가득 담은 놋그릇을 한마디로 말하면 무엇이라 하겠는가?”
수월이 놋그릇을 방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침묵했다.
그러자 만공이 껄껄껄 웃으면 수월의 손을 잡고 함께 웃었다. 두 스님의 수행 정도를 보여주는 일화로 널리 회자되는 만행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낡은 것이다. 새로운 것은 침묵 속에 있다. 그것을 찾으러 침묵 속으로 걸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