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근대문학이 20세기 초반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됐지만 일제 강점기에도 고전문학의 주요 갈래가 활발하게 창작, 향유되고 있었다. 서구에서 발원한 문예 이론과 그것에 기반한 작품들이 점차 문단의 중심을 형성하고 있을 때, 전통적인 한시문(漢詩文)을 창작하며 교류했던 지식인들도 적지 않게 존재했던 것이다. 이들은 신문을 비롯한 다양한 지면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던 벽소(碧笑) 이영민(李榮珉)이 그중 한 명이다. 문인이자 서예가로 활동했던 그는 일제 강점기 순천에서 사회, 문화 활동을 펼쳤다. 순천과 인근 지역에서 소작 쟁의를 주도해 일제에 의해 문제 인물로 주목되어 가택 수색의 대상이 되기도 했으며, 일제의 대표적인 악법인 ‘치안유지법’으로 1년 6개월 형을 받고 투옥되기도 했다.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된 이영민은 이후 사회적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되자 문화, 예술 활동에 전념했다. 지역 유지들과 함께 판소리 창자를 비롯한 예술인을 후원하는 등 순천과 인근 지역의 문인 및 예술가들과 활발한 교류 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때 문인으로서는 한시 창작에 매진해 바로 이 책 《벽소시고》를 엮어 냈다.
《벽소시고》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송명회가 쓴 서문인 〈벽소시고서(碧笑詩稿序)〉와 문집 발간을 축하하는 지인들의 한시가 권두부다. 이어지는 이영민의 125수와 지인들의 11수를 덧붙인 총 136수의 한시가 문집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뒷부분에는 부록으로서 〈청구악부초(靑邱樂府抄)〉와 〈근대국악계인물(近代國樂界人物)〉이라는 제목 아래 전통 음악에 대한 이영민의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영민의 작품 세계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유 관계다.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들과의 교유 양상은 물론, 과거에 인연을 맺었던 이들을 회고하는 내용의 작품들도 적잖이 포함되어 있다. 이영민 스스로가 서예가로 활동했기에 동시대에 활동했던 미술인들을 형상화한 작품들이 있으며, 무용가인 최승희, 여성 시인 김염운, 육상선수 손기정과 남승룡, 순천 출신의 권투선수 서정권 등 다채로운 인물을 대상으로 한시를 창작했다. 특히 부록 〈근대국악계인물〉의 작품들은 일제 강점기에 판소리 후원자로 활동했던 이영민이 창작한, 판소리 창자 등 음악인들과 그들의 예술 세계에 대해 평한 한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소리꾼, 이름난 고수(鼓手), 거문고와 가야금 연주자 등 41명을 대상으로 해 지은 이 작품들에는 이영민의 ‘우리 문화’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 깃들어 있다. 《벽소시고》를 전통 예술인들과 그들의 예술 세계를 살필 수 있는 예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책으로 꼽는 까닭이다.
이외에도 순천을 비롯한 여러 도시의 유적지와 이영민이 방문했던 특정 장소를 형상화한 작품들이 두드러진다. 특히 연자루(燕子樓)나 환선정(喚仙亭) 등의 순천의 유적지는 “과연 순천은 동방 일대 명승지 됨을 알겠더라”라고 끝맺는 그의 가사 〈순천가〉의 배경으로도 등장하기에, 작품에 형상화된 면모를 따져 그의 고향 순천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이와 함께 개인적 일상과 감회를 형상화한 작품들이 있으며, 사회의식을 드러낸 적지 않은 작품을 통해 당대 현실에 대한 이영민의 비판적 인식을 엿볼 수도 있다. 암울한 식민지 상황 속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전통 문화와 고향 순천에 대한 애정을 환기할 수 있도록 노력했던 이영민.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던 그의 생애와 행적이 정당한 평가를 받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