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TV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이 주인공 장평산 가족에게 미친 영향
1. 장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은 1937년 평안북도 룡천군 대지주 옥산 장씨 31대손 장진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형과 누님들의 사랑을 받으며 고생없이 성장했다.
2. 그러다 1946년 3월 북한의 토지개혁 당시 불로지주의 아들로 판명되어 생사의 위기에 몰렸으나 둘째 형이 아버지의 유서대로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 전부를 농민위원회에 자발로(자기 스스로) 갖다 바치면서 용서를 빌어 간신히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 체결 당시까지 평안북도 룡천군 협동농장에서 농장원으로 살아왔다.
3. 그러나 1958년 5월 30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회에서 〈반당 ㆍ 반혁명 분자와의 투쟁을 전당적 ㆍ 전인민적으로 전개할 데 대하여〉라는 5 ㆍ 30 결정에 따라 중앙당집중지도사업이 북조선 전역에서 대대적으로 실시될 때 중앙당에서 내려온 〈집중지도그루빠(소조)〉에 의해 장평산의 큰아버지가 그때까지 〈실종〉 상태로 있었다는 점, 진남포에 살던 큰고모 내외와 둘째 고모 가족 전부가 해방 후와 6ㆍ25 후에 월남한 사실이 밝혀져 월남자 가족이라는 점, 평산의 할아버지 장진관 씨가 참회하는 유서와 함께 모든 전답을 농민위원회에 갖다 바쳤으나 해방 전에는 대대로 대물림해 온 대지주였다는 점이 모두 문건으로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었다.
4. 당시 조선로동당 중앙당 집중지도구루빠가 가려낸 북한의 적대계층은 320여만 명에 이르렀다. 그중 6천여 명은 죄질이 매우 나쁘다며 인민재판을 통해 바로 처형했다. 나머지 310여만 명의 적대계층 중 7만여 명은 내각 결정 149호에 따라 산간벽지로 추방되었는데 그때 평산의 둘째아버지 장용덕과 아버지 장용욱은 평안북도 도(道) 보위부 소속 보위원들이 심야에 떼거리로 몰려와 어디론가 강제이주 시켰는데 그곳이 함경북도 연사군 삼포리였다. 그때 평산의 둘째아버지 장용덕은 24살, 아버지 장용욱은 21살, 막내고모 장용화는 19살 때였다. 소련 군정청에 여러 차례 불려 다니며 공산당원들한테 지독하게 시달려서 인사불성이 된 채로 사경을 헤매며 병중에 있었던 할머니도 그때는 구사일생으로 병환이 호전되어 생존해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 장평산은 그때까지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다…….
5. 그로부터 14년 후인 1972년 5월 아버지 장용욱(35세)은 함경북도 연사군 삼포리 작업반장 딸인 최임순(30세)과 혼례를 올렸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976년 연사군 삼포리 상단산 계곡 오두막에서 장평산이 태어났다.
6. 8년 후인 1984년 9월 평산이 인민학교 2학년 올라가던 어느 날 그는 아버지 어머니가 가림복 차림으로 찍어놓은 사진을 보고 ‘이거 언제 찍은 거야?’ 하고 물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 최임순 씨가 “1972년 5월 네 아버지하고 결혼할 때 찍은 기념사진이야.” 하면서 누나, 평산, 셋째 선영을 불러놓고 이상한 말을 했다. “어쩌면 우리 가족이 연사군 삼포리에서 또 어디론가 쫓겨가야 할지 모르니 갑자기 떠나가더라도 빠뜨리지 않고 바로 들고 갈 수 있도록 책보자기와 옷 보따리를 잘 챙겨두라.” 하고 말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들렸던지 평산의 누나가 “왜 우리가 또 쫓겨가야 되는데?” 하고 되물었다. 그러자 오마니가 “보위부에서 찾아온 사람들이 아버지를 불러낸 뒤, 남조선 KBS TV가 1983년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했는데 거기서 큰고모와 둘째 고모가 서로 만나 얼싸안고 울고 있는 모습을 사진에 담아 들고 와서 보여주며 조사할 것이 있으니까 보위부까지 좀 가자.”라고 해서 소환되어 갔다. 그 당시 상단산 아랫골에 살던 둘째아버지 장용덕과 장평산은 그의 가족 중에 큰고모 장용임(장동기 목사와 이란성 쌍둥이. 1928년생)과 둘째 고모 장용순(1931년생)이 그들 선대의 가족 구성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7. 그런데 보위부에 불려갔던 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이 돌아와서 “남조선 KBS TV와 라디오 방송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함경북도 온성군 독재대상구역으로 추방될지 모른다.”라는 말을 했다. 그때 평산의 누나 장선실(1974년생)이 “온성군 독재대상구역이 무어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이 “해방 전 지주 가족, 월남자 가족, 6ㆍ25 전쟁 당시 치안대 소속 가족들만 별도로 추방해 가두어 놓은 지역이 특별독재대상구역”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설명을 들은 장선실이 다시 “왜 우리가 그곳으로 추방되어 가야 하느냐?”라고 물었다. 그러자 아버지 장용욱이 “신의주학생의거사건 때 실종된 큰아버지가 나타났다.”라며 “남조선 KBS TV와 라디오 방송이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하면서 중국 라디오 방송의 도움으로 여태 실종상태로 묻혀 있던 큰아버지까지 찾아내어 헤어진 지 30여 년 만에 3남매가 서로 상봉할 수 있게 만들어주어 남조선에서는 지금 눈물바다를 이루고 있다.”라고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장평산의 형제들은 그때까지 큰아버지 장동기(1928년생), 큰고모 장용임(1928년생), 둘째고모 장용순(1931년생) 등 그 세 사람의 얼굴도 본 일이 없었는데. 정말 억이(氣가)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달 후인 1984년 10월 장평산의 가족은 함경북도 연사군 삼포리에서 추방되어 함경북도 회령시 22호 관리소로 실려 갔다. 그때 평산의 가족은 둘째아버지네 가족과도 헤어졌다. 그때가 1984년 10월 15일이었다.
8. 그로부터 8년이 흐른 1992년 4월, 김일성의 생일인 태양절을 맞아 “대규모 사면을 실시한다.”라는 소식이 관리소 내에 퍼졌다. 그래도 평산의 가족은 그런가 보다 하면서 달다 쓰다 말 한마디 없이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태양절 하루 전날인 1992년 4월 14일 그들 가족을 감시하던 보위원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장용욱이 보위부 사무실로 찾아가 보니 그들 가족을 그렇게도 고통스럽게 하던 보위부 지도원이 이주명령서를 내놓으며 “장아바이 가족은 그동안 어버이 수령님 시대에 단행된 대사령과 다르게 이번에는 관리소 내에서 모범적인 생활과 노동 태도를 보인 수인들을 대상으로 특별대사면이 이뤄졌소.” 하면서 4월 15일 태양절 오전 10시, 화물자동차가 그들 가족과 세간 집물을 실으러 갈 테니까 오늘 중으로 새운흥군 청년거리 로동자구아파트 2동 302호로 이사 갈 준비를 하라고 알려 주었다.
“지도원 동지! 살다 보니 태양절을 맞아 수령님의 은덕을 받는 날도 있습네다. 수령님의 은덕을 이 목숨 다하는 날까지 잊지 않갔습네다. 정말 고맙습네다.”
하면서 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며 흐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 보위부 사무실에서 들은 말을 전했다.
“아바지. 지난해 대사면을 받고 우리보다 먼저 이곳을 떠나간 작업반 동무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지난해 이주명령서를 받은 회령관리소 내 12가구는 모두 해외에 친척을 둔 세대주 가족들이라는 말입네다. 기러니까니 우리 가족이 새운흥군으로 이주를 마치고 나면 필시 새운흥군 보위부에서 보위 지도원이 나와 우리 가족 전체에게 새로운 과제와 분공을 제시하면서 전 가족이 어버이 수령님과 지도자 동지께 모범이 되고 실제적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면서 충성을 바치라는 당적 과제가 떨어진다 이 말입네다.”
9. 아니나 다를까, 그들 가족이 1992년 4월, 새운흥군 청년거리 로동자구아파트 2동 302호로 이사를 마치고 달포나 지났을까? 예상했던 대로 새운흥군 보위부 보위지도원이 찾아와 KBS TV와 라디오 방송이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하면서 중국 라디오 방송의 도움으로 수십 년 동안 실종상태로 묻혀 있던 큰아버지까지 찾아내어 헤어진 지 30여 년 만에 3남매가 서로 상봉할 수 있게 만들어주어 남조선에서는 지금 눈물바다를 이루었다는 소식과 미국 플로리다 주 탈라헛시(Tallahassee) 거주 장용복 박사가 KBS TV 생방송 이후 북한의 혈육을 찾기 위해 막냇동생 장용욱(평산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두 통을 내밀었다.
그 편지를 받고 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은 1992년 5월 “……지나간 수십 년 세월 동안 어려움도 많았으나 당의 보살핌으로 5호 농장원으로, 그 이후 정치범관리소 관할 탄광의 광부로 죽지 않고 잘살아 왔다.”라며 보위지도원이 시키는 대로 답장을 썼다. 그리고 그 수십 년 세월 동안 헤어져 살고 있었으나 큰형님(정동기 목사)의 실종으로 가족들 전체가 받지 않아도 될 고초도 많이 받았고, 의심도 많이 받았으며, 그런 가정적인 풍파로 인해 “전 가족이 가슴에 사무치는 한과 세 끼니조차 이어가지 못할 만큼 최근 들어와서는 가난에 시달리고 있는데, 되돌아보면 이 모든 수난과 아픔이 큰형님이 신의주학생의거사건을 주동한 후 소련군의 체포망을 피해 중국 상하이를 경유해 미국으로 도피한 것이 우리 가족 수난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네다.”라며 보위부 지도원이 짚어주는 대로 현실적인 고뇌도 몇 줄 적어넣었다. 그리고 편지 끝머리에다 “가족의 아픈 상처를 달래고 그동안의 멍든 가슴을 풀어주기 위해서라도 형님께서 여유가 되신다면 경제적으로 보탬이 될 수 있게 해외에서 외화를 좀 송금해주시면 안해와 자식들에게 늘 죄지은 심정으로 살아가는 이 아우에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라며 끝을 맺었다.
10. 외화를 송금해 달라는 그 말은 참으로 마음에 내키지 않았으나 보위원이 시키는 대로 자필로 편지를 써서 보위부 지도원에게 전해주고 난 뒤 한 달이나 지났을까? 1992년 6월, 미국 플로리다 주 탈라헛시(Tallahassee)에 거주하던 장용복 박사로부터 미화 5,000불이 송금되었다. 큰형님 장용복 박사는 그 편지에다 자신이 송금한 달러를 받는 즉시 답장을 하면 그가 안심하고 다시 미화 5000불을 더 송금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면서 장용복 박사는 “만약 아우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면서 중간 심부름 역할을 해주는 보위부 지도원과 같이 중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경연계선인 중국 훈춘(琿春)이나 도문(圖們)까지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아우가 직접 만들 수 있다면 전화로 그 날짜를 정확히 알려주면 내가 직접 비행기를 타고 훈춘이나 도문으로 날아가겠다.”라는 편지가 도착했다. 그러면서 장용복 박사는 “나는 조선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났으나 현재는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 국민이므로 대한민국 서울이나 중국 베이징, 도문, 훈춘, 그 어느 지역이든 여행이 가능하다.”라고 알려 주었다.
그 편지가 도착한 후 새운흥군 보위부에서는 중앙당으로부터 하달된 지도자 동지의 외화벌이사업 분공을 완수하기 위해 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을 ‘김정일 장군님의 특별배려’라는 명분으로 도와주었다. 그 첫 번째가 미국 플로리다 주 탈라헛시(Tallahassee)에 거주하는 장용복 박사와의 국제전화 통화였다. 평산의 아버지 장용욱은 새운흥군 보위부로 찾아가 보위원이 연결해 준 국제전화로 30여 년 만에 큰형님 장용복 박사의 음성을 들으며 가족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보위부가 미리 상봉 날짜를 잡아준 대로 “다가오는 8.15 해방절 날 중국 훈춘호텔까지 큰형님 장용복 박사를 만나러 가겠다.”라고 상봉 의사를 직접 육성으로 전했다.
11. 1992년 8월 15일, 그렇게 형제간의 첫 상봉이 47년 만에 이루어진 후 평산의 가족은 새운흥군 청년거리 로동자구아파트에 사는 주민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신약을 개발해 미국 100대 갑부 반열에 오른 재력을 가진 큰형님을 두었다는 소식이 지방 당기관에서 행정기관으로, 행정기관에서 보위부와 보안서까지 전파되면서 악질반동 지주 새끼로 저주받아온 장평산은 새운흥군 록화사업소 시체처리반 운전공에서 운흥기계연합기업소 운전공으로 새 직장을 배치받을 수 있었다. 물론 그의 어머니가 중국산 색TV를 뇌물로 고이긴 했으나 정치범수용소에서 갓 나온 악질반동분자 지주 새끼인 장평산이 록화사업소 시체처리반 3급 운전공으로 첫 직장을 배치받은 것은 새운흥군이 생겨난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또 장평산의 막냇동생 장철산이도 그 당시는 사리원교화소 죄수 신분으로 큰 공사장과 중노동 건설장으로 불려 다니며 강제노동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때 어머니 최임순 씨가 미국의 큰 시숙(장철산의 큰아버지) 장용복 박사가 보내준 달러 뭉치를 가지고 사리원교화소로 찾아가 뇌물을 고이며 형 장평산처럼 사리원교화소 내 트럭 운전공 조수로 일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옮겨 주었고, 그렇게 사리원교화소 생활을 끝마치고 나와서는 바로 3급 운전공 면허증을 취득한 후 그의 형이 첫 직장으로 배치받은 새운흥군 록화사업소 시체처리반 운전공으로 일할 수 있게 또다시 일자리를 배치해 주었다. 그만큼 큰아버지 장용복 박사가 미국에서 보내주는 달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외화벌이사업 시기와 맞물려 그들 가족의 운명과 팔자를 바꿔 놓았다. (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