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환경과 인류의 생활방식에 대한 고민과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화랑의 이름이
운명처럼 소설 속에서 만나다
고금란 작가는 20년 전 어느 가을, 지구 생태계를 주제로 공부하면서 지구환경과 인류의 생활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을 쓴 톰 하트만의 ‘인간이 삶의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면 21세기 말쯤 지구는 사람이 살 수 없는 행성이 될지도 모른다’라는 말에 깊은 경각심을 가졌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지적들이 하나둘 현실이 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이를 소재로 집필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울산에 있는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에 새겨진 ‘호세, 수품’이라는 두 화랑의 이름을 보고 비로소 소설의 내용을 구상한다.
계단을 내려가자 기하학적인 문양과 그림들로 가득한 각석이 나타났다. 큰 바위 중앙에 세로로 새겨진 낯익은 이름이 호세의 눈에 들어왔다.
好 世
水 品
그는 자신과 수품의 이름에 눈길을 주면서 아득한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 본문 중에서
작가는 “소위 성공했다고 하는 SF 소설이나 영화는 대부분 선과 악의 대립을 다루거나 내용과 표현이 비현실적이고 흥미 위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고 담담하게 메시지를 전하는 데 집중했다.
그런 의미에서 케플러가 만난 ‘지구’는 행성 자체이자 한별이를 비롯해 등장하는 인물들이요, 이 땅 위의 모든 생명 곧 우리 모두이다. 내용 가운데 외계에서 온 인물이나 왕국 탄생 프로젝트의 배경을 빼면 평범한 이웃들의 모험담이 떠오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와 함께 역사서처럼 사실의 궤적을 훑지 않아도, 환경 칼럼처럼 직설적인 문제를 제시하지 않아도, 소설을 읽다 보면 자연 그런 일에 또는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된다.
▶ 순일하면서도 다정한 노작가의 첫 SF 소설이
뜨거운 순정으로 세상에 남겨지기를
호세가 제일 처음 지구에 도착해서 만난 공주 개미가 인간보다 더 강한 척, 하는 모습은 얼핏 유치하면서도 미워하려야 미워할 수 없는 『어린 왕자』 속 장미를 생각나게 한다.
저 먼 북극성에서 온 호세의 이름을 들은 부산댁이 자기 남편과 같이 좋을 호에 세상 세 자를 쓰냐고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는 장면이나, 지구 밖의 세계인 외계(外界)에서 온 호세가 신라시대 때 처음 지구를 방문한 이야기에서 신라 때의 군대였던 외계(外罽)가 떠오르는 것은 새삼스러우면서도 흥미롭다.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만 순일하고, 낯선 등장인물을 배치하면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 『케플러가 만난 지구』는-오랜 활동을 하면서도 처음 작품이나 사람을 만날 때처럼 한결같은-작가의 평소 모습과도 퍽 닮았다. 자연재해나 생태계 파괴 등으로 인한 인류의 위기를 보면서 초고를 쓰던 마음과, 생명의 본질이나 만물의 상호 연관성을 빠르게 잃어가는 사회의 모습을 대하면서 원고를 마무리하던 마음이 하나였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작가가 귀하게 여기는 순정이라는 단어는 열정보다 더 뜨겁다.
오래 갈고 닦아 세상에 내놓는, 조금은 낯설고 서툰, 노작가의 첫 SF 소설이 역사와 환경과 자신의 자리를 사랑하며 지켜나가는 사람들에게 뜨거운 순정이 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