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담 사이에 핀 민들레 바라보다가
엄니의 뒷짐에 얹힌 서글픔에
앵두꽃이 피었는지
살구꽃이 피었는지“
박경희의 시는 쉽게 읽힌다. 따로 해석할 필요 없이, 세밀하고 감성적인 필치로 그려내는 삶의 풍경을 바라보고, 익살과 해학을 곁들여 살갑고 능청스럽게 펼쳐놓는 사람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된다. “살아생전 목돈 한번 쥔 적 없는 손에는 늘 쭉정이만 가득했던”(「상강에 이르다」) ‘아부지’, 그렇게 돌아가신 ‘아부지’가 꿈에 나타나자 “살았을 적에 그리 모질게 마음고생시키더니/무슨 할 말이 있어서 이승 문턱을 넘느냐고 사발째 욕을 퍼붓는”(「꿈자리」) ‘엄니’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과 마치 한집에서 오래 살아온 듯 친근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시인은 그런 ‘아부지’와 ‘엄니’로부터 이어받은 대지적 감수성과 공생·공유의 세계관을 바탕에 두고 마을 사람들의 삶에 귀를 기울인다. 시인은 ‘나’가 아닌 대상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기거나, 인간의 고독과 슬픔에 조응하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참말로 지랄맞은 시상”(「워쩌겄어」)을 살다 쓸쓸히 사라져간 이웃들의 곡진한 사연이 “마을회관에서 이야기를 한 소쿠리 내놓”(「이야기 한 소쿠리」)는 이웃의 목소리로 들려오는 한편 “그늘 깊은 집”(「그늘 깊은 집」)을 그림자로 끌어안으며 슬픔에 조응하는 감나무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도 하는 것이다.
“정성을 들였던 것들은
아픔도 죽음도 함께한다”
시인은 ‘나’를 넘어서는 곳에 자리 잡은 시적인 순간들을 포착하여 겸손하게 노래한다. 삶 도처에서 인간과 자연이 공명하고, 사람과 사람이 관계 맺으며 감정의 너울을 일으키는 순간들이다. 시인은 ‘온양댁 할머니’가 “저승 가시자 어찌 알았는지/탱자나무가 한달 만에 죽”어버리는 것을 보고 “정성을 들였던 것들은/아픔도 죽음도 함께한다”(「집이 돌아가셨다」)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기도 하고,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고사리 끊으러 다녔던/산이 사라”진 자리를 “당신도 곧 사라질 것처럼 여러날째/빈 하늘만 보고 있”는 ‘석남이네 할머니’(「산이 사라졌다」)의 모습을 보며 쓸쓸해하기도 한다. “스무살 아들이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에 밤길 밟아 달려”온 ‘누이’(「구석에서」)와 “허방 가득한 세상”(「가르랑 소리에 묻히다」)에서 “살고 싶어 용을 쓰긴 쓰는디” “허는 일마다 엎어지”곤 하던 ‘사거리집 아들’(「외로운 허수아비」)의 이야기는 서글프고 애잔하기만 하다.
“나는 절실하지 않았기에
아직도 여기에 있다”
문동만 시인은 발문에서 “박경희 시인은 ‘짠한 사연’을 널리 퍼뜨려 같이 울게 하려는 사람이고, 사라져가는 사람들의 내력과 아무도 기록해주지 않는 장삼이사들의 축약된 행장기를 흐르는 물살에 손가락으로 그어서라도 적어두려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오래전 비구니가 되겠다며 법당에 앉아 합장”하다가 결국은 “머리 긴 비구니가 되어/그늘 많은 도시로 돌아”(「폐사지를 걷다가」)온 내밀한 사연을 은근살짝 고백하기도 하지만, 짐승과 인간과 식물의 곁에서 전할 이야기가 많은 지금의 자리에서 시인은 굳건해 보인다. “절실하지 않았기에” 떠나지 못하고 “아직도 여기에 있다”(「나의 바다」)고 말하지만 실은 절실한 마음이 있기에 그는 고향에 남아 여전히 “대지의 공동체와 함께 사는 농민의 삶에 천착”(김해자,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 발문)하는 것이다.
시인은 공동체의 사람들과, 그들과 연결되어 조응하는 생명의 흐름을 포착함으로써 현실의 모습과 의미를 한층 선명하고 두텁게 만든다. 근래 보기 드문 서정적인 이야기꾼으로서 그는 그만이 쓸 수 있는 “순량하고도 고유한 마음의 ‘볍씨’들”(발문)을 잘 갈무리하여 자연과 인간에 대한 공경의 마음으로 ‘공생공락(共生共樂)’의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