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말 좋아하는 작가는 연구할 수가 없겠더라고. 그냥 즐겨야지.”
작가 이전에 광적인 독자 박대겸의 환희로 가득 찬 서사 예찬
딱히 선생님이 없던 저에게 창작 선생님처럼 다가와 준 수많은 작가들(과 더불어 그들의 문장을 한국어로 옮겨준 번역가들), 그중에서도 이 단편들을 쓰던 10여 년의 시간 동안 변함없이 문학적 스승이 되어준 로베르토 볼라뇨 선생님, 그리고 소설적 멘토가 되어준 마이조 오타로 선생님께 감사의 인사를 보냅니다.
-〈감사의 말〉 중에서
데뷔작 『그해 여름 필립 로커웨이에게 일어난 소설 같은 일』에서 작가는 수십 명의 작가와 수십 편의 작품을 호명한 바 있다. 이번 『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에서도 그는 자신의 문학적 배후에 어떤 실루엣들이 서려 있는지 굳이 감추지 않는다. 오히려 당당히 그 사실을 드러내는데, 단순한 존경의 의미인 오마주와는 또 결이 조금 다르다. 그는 관심 있는 작가와 작품을 서사로 호출하는 데 기쁨을 느끼며, 아예 하나의 이야기(호세 알프레도를 찾아서)로 빚어낸다. 그런가 하면 끝없는 독서 편력으로 흡수하다시피 체득한 문체들을 자신만의 스타일(시간의 유속)로 버무리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선배들이 앞서 이룩한 서사와 목소리를 사랑하고 즐기는 저자의 태도에는 저들의 권위를 빌리려는 치사함이나 거만함을 엿볼 수 없다. 오직 유희만이 소설을 장악하고 있어, 독자 또한 허구적 이야기를 바라보는 작가만의 관점에 기꺼이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한편 작가는 이야기를 풀어놓되 필시 통합적인 결론에 이르러야 하는 전통적인 내러티브의 구조를 택하지 않는다. 그간 탐독한 서사적 역사 없이 박대겸을 설명하기 어려울 테지만, 그렇다고 그의 소설이 기성 서사에 매몰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전적 서술, 상처를 치료해 주는 감상주의적 서사, 짐짓 지성적인 제스처를 취하는 실험소설 같은 트렌드를 정중히 밀어낸다. 서사를 실험이나 문학의 이름으로 봉합하지 않기에 소설 속 이야기는 고독하고 또 자유롭다. 그로기 상태의 복서가 꿋꿋이 마지막 라운드까지 버티는 모습처럼, 아홉 작품은 분류된 지식에 항복하지 않고 결연한 정직성으로 꼿꼿하게 완성된다.
책에 펼쳐진 아홉 편의 이야기는 다채로우면서도 통일감이 느껴지는 문제작이다. 각 이야기는 빛의 다채로운 스펙트럼처럼 저마다 고유한 서사 줄기를 띠는 동시에, 독특한 문체와 더불어 고독과 희열이라는 남다른 문제의식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작품은 개개의 퍼즐 조각이 돼 사슬처럼 상호작용하며 거대한 플롯을 구축한다. 분명 서로 다른 작중 세계에서 벌어지는 서사임에도 일관된 통찰력이 엿보이는 이야기들을 누비며 우리는 어떤 형태가 됐건 허구가 삶을 건드리고 있음을 깨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소설의 바다’를 항해하는 호밀밭 소설선,
각기 다른 ‘사연의 고고학’을 꿈꾸다
작가의 『픽션으로부터 멀리, 낮으로부터 더 멀리』는 소설의 바다로 향하는 호밀밭 소설선의 열 번째 작품이다. 호밀밭 소설선 ‘소설의 바다’는 한국 소설의 사회적 상상력을 탐구한다. 또한 문학과 예술의 미적 형식을 타고 넘으며,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흔적을 새롭게 탐사하는 서사적 항해를 꿈꾼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아파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또 때로는 서로를 보듬으며, 난파한 세상 속으로 함께 나아가는 문학적 모험을 지향하는 것이다.
호밀밭의 소설은 우리가 상실한 생의 가치와 존재 방식을 집요하게 되물으며, 동시에 우리 삶에 필요한 따뜻한 자원을 발굴하는 ‘사연의 고고학자’가 되고자 한다. 소설이라는 사회적 의사소통 방식은 분명 오래된 것이지만, 그 속에는 우리 삶과 공동체의 가치를 새롭게 정초할 수 있는 ‘여전한 힘’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소설의 바다’로 나아가려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