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삭바삭 볕이 마르자
토독 톡 톡
혹독한 여름을 이겨낸
별들의 자축, 폭죽 터진다
해의 부름으로
생의 작은 문을 나온 풀씨
싹을 보고서야 그 존재를 알았다
대대로 답답함을 싫어했기에
애초에 흩어뿌림을 주문했다
돌볼 틈 없는 다산에서 길러진 성품일까
줄 맞춰라 밥상머리 교육에 열 올렸지만
은둔형 고립형 내성형이 아닌
튀기 좋은 자유형의 DNA
마루 틈새에
나물 그릇 언저리에
서랍 속의 나이 잊은 깨알 씨앗
허를 찌르는 본성
빈틈으로 숨어든다
- 「참깨의 성격」 전문
참깨가 햇볕 속에서 톡톡 씨방을 터트리는 풍경 속에 내재하고 있는 생명 현상과 움직임을 해부학적인 시선으로 성찰하고 있다. 이 시를 주목하는 것은 해의 부름으로 ‘토독 톡’하고 참깨가 스스로 생의 작은 문을 뛰쳐나오고, 대대로 답답함을 싫어해 애초에 흩어뿌림을 주문했었고, 돌봄 틈이 없는 다산에서 길러진 성품이고 자유형의 DNA라는 발견에 있다. 그리고 시인의 안목이 유별난 점은 ‘참깨’의 성격을 ‘허를 찌르는 본성’에 전이한 것도 그렇고, 참깨의 생태학적 성격과 인간형을 절묘하게 오브랩하여 공감하게 한 점이다.
자연과학과 인문학이 조화롭게 버물려 자유분망한 생의 모습을 유추해 낸다는 점이다. 대상을 자기화하고 자기를 대상화하는 곳에 생기는 의미정신이 삶의 재발견이기 때문이다.
시가 일상의 재발견 혹은 일상의 장엄함을 새롭게 짚어내는 것이라면 세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이 각각의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서로 만남으로서 새로운 관계의 의미로 거듭나는 일이다. 이처럼 시창작이 시인이 시적 대상과 맺어야 할 바람직한 관계개선이라는 점에서 조숙진의 시적 안목을 주목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정시의 원형은 일반적으로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추구, 즉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늘어진 마당이 접힌 곳
올봄 민들레 앉았던 곳
그 자리엔 시간이 거꾸로 간다
햇살이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보는 아침나절
깔깔깔 모여 나물 캐던
산골짜기 가재 잡던
아이들 그 속에 다 모였네
바람의 장난에 숨어 버릴까 봐
노란 대문 살며시 닫자
눈웃음 마주친
꽃과 나
우리, 구면이지요?
- 「우리 구면이지요」 전문
시가 재미있고 정겹다. 한번 쯤 나도 저런 대화를 해보고 싶은 간절함이 샘솟는다. 올봄 민들레가 앉았던 마당 구석진 곳에 시간이 거꾸로 간다는 첫발상이 그렇고, 거꾸로 가는 시간의 선로를 따라가며 오랜 기억을 만나는 시적 안목도 그렇다. 그 시간의 풍경 속에 모여 있는 깔깔대며 나물캐던 아이들과 산골짜기 가재잡던 아이들도 그렇다.
그런가하면 바람의 장난에 그 새록한 기억들이 달아날까봐 마음속의 노란 대문을 살며시 닫자 눈웃음 마주친 꽃이 ‘우리 구면이지요?’라고 묻는다.
‘우리 구면이지요’
이 한마디의 의미는 깊고도 넓다.
‘통합의 안개’ 속에서 형태와 힘이 끊임없이 뒤섞이며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서 살며, 다른 동물도 다른 존재로 구분하지 않고 그저 겉모습이 다른 생명체로 인식하며 하나의 생명 안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산, 폭포, 숲도 주체성이 충만한 살아있는 존재로 여긴다.
인류가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하며 지구의 작용들을 사유화하여 효율성을 사회의 지배적인 주제자리에 올린 우려를 밑자리로 해 놓았다. 인간의 지혜는 하나같이 자연의 순리에서 모방하고 훔쳐온 것임을 자인하면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훼손된 본질을 복원해가야 하는 터닝포인터에 와 있다.
그래서 자연의 일부로서 어떻게 적응하고 회복하며 살 것인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세계는 관계하고 통섭하는 관계의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나를 힐끔 쳐다본 꽃이
돌아오는 길 또 힐끔거린다
왜 그렇게 보느냐고 눈썹을 올리자
봄 아니에요?
되레 묻는다
봄이 아닌 것 같냐고 물으니
아직 겨울인가요?
또 묻는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니
표정이 아직도……
고목 나뭇가지에
늦게 피우는 꽃이라서 그렇다고 해 둘까
한겨울 찬바람에 휘둘려서 그렇다고 할까
여린 싹은
굳은 흙도 어영차 밀어 올리고
돌덩이도 둘러메치는데
내 표정의 행방을
거울 속의 그녀와 이야기해 봐야겠다
- 「계절의 훈수」 전문
우리 삶의 모든 게 계절의 훈수다.
봄이 오면 온몸으로 봄을 느끼고 여름이 오면 여름을 느끼고 가을이면 가을을 만나는 것이 순리대로 사는 삶이고 철든 삶일 것이다. 그럼에도 시인은 봄이 와 세상 모든 것들이 봄을 완상하는데도 겨울 속에 멈춰있는 철들지 못한 자신에 대한 성찰이다. 사소한 일상에 안겨있는 삶의 풍경을 놓치지 않고, 그 관계성을 토대로 생태학적 사유와 통섭한다.
서정시에서의 중요한 키워드는 생태학적 사유다. 생태학적 사유를 밑자리로 세계의 관계성을 풀어낼 때 서정의 본질을 헤아릴 수 있다. 이것이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고 즐겁게 해주는 공감의 말하기 방식이다.
공존과 공감,
공감은 공존에서 가능한 삶의 아름다운 가치다.
호모사피엔스인 인간은 지구상의 동료인 생명체와 공존하며 번영할 새로운 방법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생명애 의식은 평등의 가장 심오한 표출이면서, 자율성이 아닌 포용성에서 비롯되는 평등이기 때문이다. 평등의 표출은 법률과 선언을 통한 인정이 아니라 가장 단순한 공감의 행위에서 비롯된다. 공감의 진화는 ‘내 것과 네 것’이 아닌 오직 ‘나와 너’로 존재한다.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다. 전부가 모여 하나가 되는 것이다. 함께하는 인류가 진정한 인간이고 개인은 스스로 전체의 일부로 느끼는 용기를 지닐 때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서정으로의 확장이다.
그는 공감회로의 회복을 통해 문화적 공감력, 생태적 공감, 거버넌스적 공감대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관계적 자아를 회복하고 서정적 상상력을 확장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