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의 접근이 어렵지 않고 작품성은 올곧은 전병석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철저하게 시단의 폐습으로부터 자유로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흐뭇하고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 손진은 (시인ㆍ문학평론가)
일상인의 화법에 스며든 생명성와 웅숭깊은 정서 그리고 유머
시는, 특히 현대 시는 어렵다. 큰마음 먹고 시집을 펼쳐 들어도 그 난해함에 이내 접게 된다. 모든 시가 그렇지는 않다 해도 많은 시가 그러하기에 독자에게 외면받는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는 한탄이 많이 들리지만, 반복해 읽어도 그 뜻을 헤아리기 힘들다면 시의 책임은 없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손진은 문학평론가는 이를 “시단의 폐습”이라고까지 했다. 이러한 시대에 전병석의 시는 남다른 가치를 지닌다. 사용하는 어휘와 표현이 일상인의 그것 자체이며, 그렇기에 되레 시의 메시지가 증폭돼 전달되기 때문이다.
소재 역시 흔하다. 노점의 붕어빵, 길가의 애기똥풀꽃, 식품의 유통기한, 봄의 불청객 황사 등 언제나, 누구의 입에나 오르는 흔한 사물과 말과 현상이다. 그런 만큼 표현도 담담하다. 어떤 시는 마치 어린아이가 오늘 있었던 일을 서술하는 듯한 인상마저 준다. 가령, “오늘은 붕어 열 마리를 샀다”(「붕어빵」)라든가, “동수 아버지는 똥수 아버지”(「애기똥풀꽃」) “봄바람이 불어오는데 창을 닫는다”(「4월 생각」)라는 식이다. 그중 이 시집의 첫 시 「붕어빵」은 평범한 화법과 풍성한 메시지의 조화가 백미를 이루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찬 바람이 매서운 / 퇴근길에 / 팥 다섯, 슈크림 다섯 / 붕어 열 마리를 샀다 / 아들이 아니라 / 아내에게 줄 거라 답하니 / 덤으로 한 마리 더 담는다 / (중략) / 나는 받은 대로 돌려준 / 때로는 조금씩 떼먹은 / 덤 없는 사랑이 부끄러워 // 덤으로 받은 붕어 잘 기르다가 / 따듯한 날 신천에 놓아야겠다 _「붕어빵」 전문
한 편의 시 그 어디에도 읽다가 어렵게 느껴져 멈칫하게 되는 곳이 없다. 그런데도 2연 “덤으로 받은 붕어 잘 기르다가/따듯한 날 신천에 놓아야겠다”로 넘어가는 순간 잔잔한 수면 같던 시에 물결이 일렁이며 큰 파동이 인다. 인심 좋게 하나를 더 준 상인의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그대로 이어받아서 자신도 그렇게 베풀며 살겠다는 생각을 “붕어 잘 기르다가 / 따듯한 날 신천에 놓아야겠다”라고 표현하면서, 일상에 커다란 생명성을 부여하고 독자의 내면에 많은 물둘레를 일으킨다. 일상인의 언어가 큰 사유로 이어져 읽는 이의 삶과 크게 공명하는 것이다.
자연에서 발견하는 동심과 유머
쉽게 쓴 글이 잘 쓴 글이라고들 한다. 많은 경우, 그러한 글에는 동심이 엿보이기도 한다. 전병석의 시가 그렇다. 그의 시 곳곳에 어린아이 것과 같은 순수한 정서와 표현이 가득하다. 그러한 동심이 자연물을 통해 표현되면서 유머로 발현되기도 한다. 그의 시선이 닿는 자연물의 범위에는 한계가 없어서, 이번 시집 68편의 시 중 절반 이상이 자연을 소재로 할 정도다. 계절, 하늘, 바람, 바다와 파도와 바위, 잡초, 돌멩이, 과일, 나무 등 사람의 일상과 삶을 둘러싼 자연 곳곳에 시인의 시선이 머물고, 그 머묾에서 다음과 같은 시들이 탄생한다.
봄과 여름 사이 / 한 꽃나무 아래에서 / 꽃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 잔기침처럼 간질이고 / 기름처럼 미끌거리기만 할 뿐 / 노랗고 하얗고 빨간 꽃이 / 섞여 이름도 섞여서 맴돈다 / 머리를 굴려도/ 공익광고 같은 생각만 떠올라 / 꽃나무의 이름을 놓아버리고 / 가만히 슬픔처럼 안는다 / 그제야 노랗고 하얗고 빨간
내 걱정을 아는 꽃들이 가만히 속삭였다 / 병꽃, 병꽃이잖아 _ 「병꽃이잖아」 전문
작은 나무 아래에 선 시인은 꽃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애를 태운다.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아 결국 포기하고 가만히 슬픔처럼 미지의 이름을 안는데, 이런 슬픔을 자연이 그냥 두지 않고 속삭여준다. “병꽃, 병꽃이잖아.” 자연 쪽에서 사람에게 말을 걸어오는 동심의 세상. 손진은 문학평론가의 말처럼, 전병석의 시에서 드러나는 자연은 “인생과 인연을 건드리면서 동심을 놓쳐버린 우리를 돌아보게 하는 힘”을 지닌다. 유머는 이런 힘을 더욱 고양한다. “머리를 굴려도 공익광고 같은 생각만 떠올라”라는 표현에서 웃음이 나고, 이 유머가 시인이 얼마나 이름을 생각하기 위해 애를 썼는지 안타까움을 그대로 전해준다. 다음 시에서도 같은 묘미를 만날 수 있다.
모든 게 꽃이 아니라 / 똥이 되는 시절이 있었다 / 동수 아버지는 똥수 아버지 / 동자는 똥자 / 봄동은 봄똥 / 모두 꽃이 되기 위해 똥심을 쓰던 시절이었다 / (중략) / 애쓰면 꽃이 되는 시절이 오는가 싶었다 / 그런데 너도 나도 / 속은 똥이면서 겉은 꽃이고 / 겉은 꽃이면서 속은 똥인 / 애기똥풀꽃 같은 이상한 시절이 와 버렸다 _ 「애기똥풀꽃」 전문
애기똥풀꽃이라는 자연물을 보면서 그 옛날, 어린아이가 “똥” 자를 붙여 놀던 기억을 불러와 웃음을 자아내고, 모두 꽃이 되기 위해 ‘똥심’을 쓰던 시절이었다는 말로 자연물의 이름에 담긴 인생사의 이치를 이끌어낸다. 한 단계 나아가, 겉보기에만 화려하고 내용은 형편없는 세태를 “속은 똥이면서 겉은 꽃”인 시절이 와버렸다는 현실 비판적 메시지까지 담아내 시의 차원을 격상한다. 자연물과 시인의 시선이 만났을 때 동심이 열리고, 그 동심에 유머가 더해져 시의 메시지가 학장되는 것이다.
가르침과 배움 사이에 선 시인의 가만가만한 말들
오랫동안 교직에 몸담아 온 시인답게 청소년과 교육 문제가 시에 담긴다는 특징도 눈에 띈다. “찔레꽃이 피는/강가로” 우리를 데려가 때를 밀게 하신 어린 시절의 선생님과의 기억(「찔레꽃 향기」)이 현재 교직에 몸담은 시인의 현실이 돼 학생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한다. “슬픔이 뛰어내리지 않으니/네가 강 다리에서 뛰어내리려 하는구나”(「꿈이었으면」)라는 말에서는 제자들에 대한 시인의 슬픔과 안타까움이, “꽃으로도 안 된다/마음으로만 해야 한다/그 마음도 들키면 안 된다”(「선생질」)라는 말에서는 우리 교육을 바라보는 시인의 씁쓸한 마음이 전해진다.
자연물과 사람과 사물을 대하는 동심 어린 마음, 그와 함께 전해지는 시인만의 깊은 서정성과 인생에 대한 지혜가 과장됨 없는 일상인의 화법으로 전해져, 시가 어렵게만 여겨져 외면받는 시대에 독자에게 삶에 큰 자장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