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여덟이라는 늦은 나이에 매일신문과 경남신문, 이렇게 두 군데 신춘문예로 세상에 등장한 이숙경 작가는 정통소설이 보여주는 올드함에 영혼을 뒤흔드는 마법의 가루를 뿌려놓았다. 동료작가들이 꽃가루 좀 그만 뿌리라고 그렇게나 조언해도 그녀는 여일하다.
“이렇게 쓰고 싶은 걸 어떡하니!”
웬만큼 자기 성격대로 쓰는 스타일이지만 등장인물에 대한 애정과 이해와 감정이입이 없이는 단 한 줄도 못쓴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독자들은 어쩔 수 없이 또 꽃가루 세례를 무수히 받게 될 운명에 처했다. 하지만 문장을 만지는 솜씨며 인물을 다루는 역량은 그가 왜 작가일 수밖에 없는지를 입증하는 유력한 논거들이다.
이번 소설집 역시 작가 특유의 독보적인 우울함과 도발성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운명적 불행을 한껏 부조시키는 스토리텔링이 주를 이루고 있다. 어찌하여 등장인물 태반이 황지우의 시구처럼 “나, 이번 生은 베렸어.”라는 고백을 하는지 의문이지만, 이숙경 문학 특유의 매력이자 지표인 가족서사,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서사는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문장력과 디테일을 다루는 솜씨, 스토리를 짜나가는 재능 등을 모두 갖춘 작가임을 유감없이 증명해보이고 있는 아홉 편의 소설은 세간의 무심함 속에서도 독자들의 가슴을 후벼 팔 것이 분명하다. 그녀의 마지막 일성.
“지리멸렬한 세상에서 지리멸렬하게 살아남아 지리멸렬한 소설들만 쓰다 간다”
평생 소설(님)에게 그토록 처절하게 애정을 갈구해왔지만 결국 다정한 포옹 한 번 못 받아본 채, 작가는 소설과의 연애를 끝낼 모양이다. 하지만 비록 실패를 자인하고 작가 폐업을 선언하기 직전이기는 하나, 자본주의 세속의 규율에서 밀려난 주변부 존재에 대한 애정, 그 애절한 애정으로 그녀의 소설세계는 확장되었다고 믿는다.
주류 질서를 비껴가는 인물들의 고요하고 다양한 목소리를 형상화하는 것, 그들이 사회적 지탄을 받을지라도 끌어안아 주는 것. 작가는 늘 그 중심에 서 있었다고 소심(?)하게 자부한다.
내면의 독자성을 자랑하지만 결국 실패하는 인간들의 부류에 작가는 발을 들여놓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빼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작가는 그 인간적 실패 속에서 독자들을 만난다. 결국 실패의 대상으로서 유일한 작가의 자아는 실패의 주체로서 모든 독자와 공유하는 자아이다. 그 누구도 눈여겨보지 않았다고 그렇게나 슬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러나, 아쉬움은 많았으리라 짐작한다.
이런 하소연들과 내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지리멸렬한 문장을 꼭 넣어달라는 작가의 고집을 편집자는 (어쩔 수 없이)수용해야 했다. 책 팔 생각이 전혀 없는 작가를 만나면 꼭 이렇더라. 이럴 때 작가님은 꼭 이렇게 대응하시더라.
단편 하나하나에 작가의 한줄 마음을 부언해 달라는 요청마저 거절하지 못하는 힘없는 편집자는 받아쓰기 하는 심정으로 작가의 마음이라는 문장 몇 개씩을 ‘복붙’하여 붙인다.
아참, 작가 주장에 따르면 이 소설집을 마지막으로 소설에 대한 모든 미련을 접겠다고 하나, 워낙 감정선이 오락가락하니 향후는 모를 일이다.
1. 유다의 키스. 개인의 주체적 삶을 방해하는 것은 관습과 상투이기도 하지만, 한 시절의 편견이나 미망이기도 하다. 칼날 위에 서 있던 시절을 이렇게 남길 수 있어서 다행이다.
2. 남해금산. 미성숙한 작가 지망생들을 현혹시킨 예술가의 패턴은 그동안 묵인되어 왔던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자칫 회오와 자책으로 끝날 상처가 과연 글쓰기로 치유될 수 있을지.
3. 곧 죽어도 로맨티스트. 죽을 때까지 정신 못 차리는 로맨티스트. 주류 질서를 비껴가는 인물들이 밑바닥 삶에서 어떻게 고통의 기억이 현재화되고 균열을 일으키는지 주시했다.
4. 당신은 픽사베이에 있다. 충동적 열정과 혼돈의 이면에는 고통의 세계가 존재한다. 소설을 쓴다는 것은 등장인물들에게 ‘네 말도 맞다’고 말해주는 것. 잊혀질 나에 대한 마지막 위로.
5. 죽은 자의 블로그. 평범한 인생 경험과, 때로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감각에 대한 기억에 의존하는 소설 쓰기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시각적 문학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소설을 쓴다는 것은 특정 장면을 눈앞에 떠올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6. 왈츠를 배우는 남자. 일상의 밑바닥에서 꿈을 꾸면서 자유와 운명을 손에 넣으려 하나 결국 실패를 거듭할 뿐이지만, 운명이 간섭하지 못하는 미학적 실천의 자리는 남아있다고 생각한다.
7. 흑싸리. 남들만큼만 살아보겠다는 지극히 소박한 이해타산의 끝은 무너진 풍경. 애초에 답이 없고, 답이 있었던 적도 없었다.
8. 당신의 마지막 연인. 회전축을 잃고 공회전 중인 현재와는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에게, 상상력을 섞어 다시 빚어낸 가능성의 영역으로 안내한다. 독법의 시간이 낯설고 충만하기를.
9. 1944, 테러리스트, 첼로. ‘아무리 디테일과 문장에 강하고 스토리를 엮어내는 재능이 뛰어나도 그것이 진정성과 설득력을 가진 작품으로 구성될 때 텍스트들이 비로소 진짜 자기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라는 평론가의 반주례사 비평을 달고 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소설 뒷머리에 진정성 없다고 써제끼는 평론가는 좀 멋있어 보이지 않나? 그래서 굳이 올려놓았다는 후문이 있다. 반주례사 비평 속에 사금파리처럼 섞여 있던 주례사 비평 한 바닥 올리면서 위안을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