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眞境)에 들어서다
김영탁(시인·『문학청춘』 주필)
김육수는 외롭고 쓸쓸한 발걸음을 가진 방랑자이면서, 아무도 없는 혼자만의 아득한 공간에 주목한다. 그 공간에서 대상들의 존재나 추억을 소환하는 노래를 부르면서, 공간은 다시 태어나 작동한다. 그러니까 생명을 가진 그 공간은 진경(眞境)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 노래들과 진경(眞境)들은 무정물과 유정물이 상호교감하면서 전통적인 서정시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실재계의 잔영 위에 단순하게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의 융합을 통해 재구성됨으로써 언어들은 새생명을 얻어서 살아서 움직이고 있을 터이다. 김육수가 구현하는 뭇 생명들은 전통적인 서정의 심상으로 쓸쓸함과 고독에서, 오히려 시의 감흥을 점층적으로 고조하고야만다. 이는 공자(孔子)가 주장했던 “관저의 시는 즐거우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프면서도 마음을 상하지는 않는다(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논어·팔일(八佾)』; 『시경』의 「관저(關雎)」 편에 대해 붙인 논평)라는 말과 연대하고 있다.
숲속에 걸친 빛들은 물러가고
어둠이 채워지는 산길로
저녁이라는 말들이 길게 드리운다
산모퉁이에 자그마한 집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는
환했던 낮과 저녁 사이에 태어난 말들,
그 수련한 말들은 허공의 빈 의자를 찾아간다
산 그림자가 지워진 저녁 하늘
풀벌레 울음소리가
오두막에 쉬고 있는
한낮의 말들을 지우고
저녁이라는 말들이 울고 있다
어깨를 다독이는 달빛을 품고
소로 小路로 가는 상처 난 영혼들
걷는 발걸음 소리조차 부담스러워
바람길 따라 침묵 속에 간다
아직은 밤이라고 말할 수 없는
물렁물렁한 저녁의 말들이
허공의 빈 의자를 채우고 있다
-「저녁이라는 말들」 전문
시 「저녁이라는 말들」은 동양시론에서 언급하는 시화일률詩畵一律을 소환한다. 이 시를 보면, 저녁의 정취와 심상을 노래하고 있는데, 시는 소리 있는 그림이 되고 그림은 소리 없는 시가 되는 걸 경험한다.
“숲속에 걸친 빛들은 물러가고”라는 평이한 진술을 통해 해가 저물며 어둠이 깔리는 순간을 자연스럽게 그린다. 이때 “저녁이라는 말들이 길게 드리운다”라는 표현은 저녁이라는 실체의 기의를 넘어서, ‘저녁이라는 말’ 자체의 기표를 만나면서, 길게 드리운다는 말이, 그러한 말들이 저녁의 감정과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각적인 형상화를 통해, 하루의 끝자락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길이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연에서는 산모퉁이에 있는 작은 집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저녁이라는 말들’에 관한 화답의 형태를 띠고 있다. 즉, 낮과 저녁 사이의 과도기적 순간을 상징하지만, “환했던 낮과 저녁 사이에 태어난 말들”은 기의와 기표의 간극에서 발현하는, 저녁이라는 말들의 감정과 심상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그리하여 정제된 언어들의 수련한 말들이 “허공의 빈 의자를 찾아간다”라는 진술은 낮이라는 현실적인 공간에서 저녁이라는 환상성으로 이동하면서, 완전한 저녁으로의 자리를 잡는 태도이다.
현실에서 벗어나 환상의 공간으로 진입한 말들은 어디론가 사라질 듯한, 불안감을 빈 의자를 찾아가는 행위로 말미암아 허공에서 충분히 머물 수 있다는 걸 암시한다. 그러므로 정제된 수련한 말들은 초월적 존재로서, 저녁이 주는 시간들의 고요함과 무의미의 의미를 찾아가는 탈속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세 번째 연에서는 저녁 하늘과 자연의 소리가 어울리며, 인간이 활동하는 낮이라는 개념을 희석시킨다. “산 그림자가 지워진 저녁 하늘”은 새롭게 태어나는 저녁 하늘을 산 그림자를 대체하여 저녁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풀벌레 울음소리”는 인간의 소리를 지우고 저녁다운 자연의 소리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소리는 오두막에 잔류하고 있는 “한낮의 말들을 지”움으로써, 인간은 저녁에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잘 수 있을 터이다. 인간이 잠자고 자연의 소리만 존재하는 저녁에 “저녁의 말들이 울고 있”는 풍경은 시적인 중의와 재미를 더한다. 한편 저녁을 표상하는 말들이 울고 있다,라는 건 일견 고요함과 쓸쓸함을 배경으로 깔고 있지만, ‘저녁이라는 말들이 운다’라고 할 때, 말들〔馬〕이 우는 모습과 울음 섞인 말들〔言語〕이 비처럼 내리는 장면을 연출한다.
한편으로는 저녁이라는 말들이 밤을 향하여 달리는 말처럼 고요한 역동성을 표방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저녁을 관통하여 깊고 깊은 밤의 정점을 향한 덧없는 시간들의 흐름이, 저녁이라는 말들이, 언어의 기표로서 거부할 수 없는 시간의 무차별한 흐름을, 저녁 하늘과 오두막이라는 공간에서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다.
네 번째 연은 저녁의 달빛으로 위로받은 화자는 다시, 상처 난 영혼들에게 은근하게 위로함으로써, 자기 겸손과 위로의 선순환이 작동하고 있다. “어깨를 다독이는 달빛을 품고”라는 진술에서는 화자와 상처 난 영혼들이 동일시되지만, 일차적으로 달빛이 영혼들을 위로하듯 감싸는 모습을 드러낸다. “소로小路로 가는 상처 난 영혼들”은 다사다난한 현실의 삶에서 벗어나 저녁을 맞이하여, 작은 길을 따라가는 상처 입은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그들이 안식처를 향하여 가는 여정에 화자는 “걷는 발걸음 소리조차 부담스러워”하며 타자에 대한 배려를 하고 있다. 이어서 “바람길 따라 침묵 속에 간다”라는 진술로 미루어 볼 때, 상처 난 영혼들과 화자는 소로를 행진하는 그 대열 속에 함께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침묵 속에서 낮 동안 뜨거웠던 일상의 소용돌이가 정제되면서, 조용히 길을 따라가며, 고요한 밤의 사원으로 귀환할 채비를 한다.
마지막 연에서는 화자는 저녁으로 귀환을 앞두면서 중간계에 머물고 있다. “아직은 밤이라고 말할 수 없”다고 진술하는 걸 보면, 저녁이지만 아직 완전한 밤이 아닌 과도기적인 상태를 드러내고 있다. “물렁물렁한 저녁의 말들”은 저녁의 부드럽고 애매한 감정을 상징하는데, “허공의 빈 의자를 채우고 있다”라는 진술에서 확연하게 오는 건 황홀감이다. 화자는 이 애매하고 물렁물렁한 심상으로 고요한 밤의 사원으로 귀환을 미루면서, 저녁의 말들이 허공의 빈 의자를 찾아가는 진경을 목도하는 황홀경에 몰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저녁의 말들은 탈속한 휘발성을 획득하며, 아주 가벼운 상승의 기운으로 자유롭게 비상하는 시인의 시어일 수도 있고, 미지의 태어나지 않은 그 무엇, 그러니까 언어 넘어 언어의 지위를 얻으면서 황홀경에 도달한다.
시 「저녁이라는 말들」은 저녁이라는 시간대를 공간성(굴뚝, 오두막, 빈 의자)과 상호교환하면서, 허공이라는 또 다른 공간을 창출한다. 그 공간들은 자연의 변화와 화자의 심상을 통하여, 언어의 황홀경에 도달하는 여정을 그리고 있다. 낮 동안의 생산된 익명의 말들을 정제하는 과정을 감성적으로 섬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저녁으로 자연스럽게 진입한다.
김육수는 저녁이 주는 고요함과 쓸쓸함, 그리고 하루의 끝자락에서 느껴지는 심상들을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를 통해 새로운 공간을 건축한다. 허공에 떠 있는 셀 수 없는 빈 의자들의 미지의 언어들을 목도하며, 황홀경에 도달하는 진경을 도출한다.
궁극엔 화자가 도달할 종착점은 밤의 사원일 것이다. 이 사원은 죽음과도 유사한 가사상태假死狀態라고 볼 수도 있겠다. 가사라는 자연섭리의 죽음을 통해서 다시 아침을 맞이하여, 되살아나는 게 인간의 삶일 터이다. 인간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순리일 터이지만, 화자는 중간계에 머물면서 유보적인 상태에서 진경을 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삶이 쓸쓸하고 외로울지라도, 저녁의 말들은 허공의 빈 의자를 채우며, 황홀한 진경을 연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