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그어보고 그어본 선으로
지난겨울, 눈 밭 위에 누드크로키를 한 사진 한 장이 카카오 톡으로 날아들었다. 아무런 문자도 없이 선문답을 하듯 보내온 것이었다. 각도만 조금 다를 뿐 이 책, 3장 ‘판화와 자연에 콜라주 & 추상누드’의 62p에 실린 작품이다. 나의 응답은 ‘그잖아도 눈이 와서 정 선생님이 눈밭에 그리겠구나, 했는데......’였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이런 작품이 누드크로키를 하는 사람들의 교재가 되는 책에 실리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눈밭 위에 먹물을 떨어트려 누드크로키를 하다니! 이는 기존에 없는, 세상 어느 누드크로키 화집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드로잉인 것이다. 선(線)을 수없이 그어보고, 그어본 시간이 쌓여 표출된 81세의 정춘자 그녀이기에 가능한 작업인 것이다.
때론 하늘하늘 나부끼듯, 때론 힘차고 의연하게 우뚝!
이 책 ‘여든하나의 누드아트 북’의 특징은 기존의 단순한 보고그리기 식의 누드크로키 북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필부터 대붓까지의 다양한 붓질에 동양화의 농담을 가미하기도, 직접 조각한 음각이나 양각의 새김(6개월을 조각한 노자의 도덕경 전문 등)을 판화로 만든 뒤 그 위에 누드를 그려넣기도, 돌이나 눈밭 등 자연물에 그래픽을 이용해 콜라주를 하기도, 여체가 간결한 기호처럼 보이는 추상누드를 시도하기도 하며 그녀는 다양한 방법으로 누드크로키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단순히 실물대로 그리는 식의 일반적인 표현이 아니며, 정춘자 그녀의 심신을 통해 재생산되어 또 다른 존재를 탄생시킨 작품세계인 것이다.
이 작품집은 일차원적인 평면작품을 단순히 나열하는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상당히 독특한 구성을 가지고 있다. 다음과 같은 소제목을 달고 5장으로 나뉘어져 일차원에서 시작해 점차 이차원 삼차원 사차원으로 점차 심도를 더하는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누드크로키를 새겨 넣은 조각품을 그래픽으로 자연(바위에 남겨진 눈 사진)과 합성해 놓은 작품(78p)까지 수록되어 있다.
그렇기에 1장은 사뿐히 날아오르듯 간결하게, 2장은 붓을 쥔 손길을 따라 구륵(鉤勒)까지, 3장은 판화와 자연에 콜라주 & 추상누드, 4장은 조각 작품 속에 스며든 라이프드로잉, 그리고 5장은 81세 정춘자 그녀는……으로 구성되어 서사를 이루며 진행된다. 또한 그렇기에 이 ‘여든하나의 누드아트 북’은 사이사이 개인사가 담긴 몇 장의 사진도 실려 있다. 이는 정춘자 작가의 다양한 작업과정에 내재되어 있는 일종의 퍼포먼스까지 포착하고자하는 의도인 것이다.
정춘자 작가는 말한다. 자신에게 있어 누드크로키를 하는 순간은 명상의 시간이라고. ‘숨을 들이마시며 행복합니다. 숨을 천천히 내쉬며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만족합니다.’ 하고 스스로에게 단 한번 말이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속사화(速寫畵)를 한다고. 그렇기에, 조각가이며 화가인 81세 정춘자 작가의 내공으로 펼쳐진 라이프드로잉 ‘여든하나의 누드아트 북’은 누드크로키를 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침이 되기에도 충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