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본업인 시는 물론 소설, 동화, 우화, 산문 등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를 이어오고 있는 조항록 시인이 첫 우화집 『전생을 기억하는 개』(달아실 刊)를 펴냈다. 달아실출판사의 〈철학이 있는 우화 시리즈〉의 네 번째 우화집으로 나왔다.
우화집 『전생을 기억하는 개』에는 총 69편의 짧은 우화가 수록되어 있고, 45편의 독특한 그림을 함께 싣고 있어서 독서와 그림 감상을 동시에 즐길 수 있다.
이솝과 라퐁텐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조항록 시인은 이번 우화집이 “재미와 각성을 담은 당의정 같은 우화가 되길 바란다”며 이렇게 얘기한다.
“누구나 그렇듯 종종 세상의 부조리와 이율배반에 맞닥뜨린다. 그때마다 분노와 환멸의 감정이 치밀면서, 그것이 곧 인간의 속성이며 숙명이라는 사실에 낙담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영영 미워해야 하나? 어쩔 도리 없다고 포기한 채 조롱이나 퍼부어야 하나? 어쩌면, 아직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소박하지만 진정한 각성이 그 굴레에서 세상을 마땅히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책의 짧은 이야기들 속에 그런 바람을 담았다.
교훈과 경각심을, 감정과 선전 선동을 전하는 데 우화만 한 형식이 없다. 우화는 당의정처럼 긍정적인 착각 안에 메시지를 담는다. 우화를 읽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새 삶과 생활의 어떤 질병을 치유받는다.
이 책에 창작해놓은 69가지 우화에도 그와 같은 효능이 있기를 기대한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시시한 이야기들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재미와 각성을 안겨주면 더 바랄 나위 없겠다. 잠깐의 재미와 각성이 쌓이고 쌓여 결국 우리의 일생이 완성되니까.”
2천여 년 전 우화라는 형식을 만들어낸 이가 이솝이라면 3백여 년 전 이솝의 우화에 꽃을 피운 이가 라퐁텐이다. 우화라고 하면 흔히 어린이를 위한 장르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솝의 우화집이든 라퐁텐의 우화집이든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어린이가 아니라 어른들을 위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조항록의 우화집 또한 어른들을 위한 우화집에 가깝다.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권선징악과 사필귀정이 불가능한 세상을 비튼다. 가치가 전도되고 진실이 왜곡된 세상에서 등장인물들의 갈팡질팡하는 모습-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우리들의 일그러진, 웃픈 자화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을 69편의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 〈철학이 있는 우화〉 시리즈인 만큼, 편 편마다 삶의 의미와 본질을 통찰하게 하는 촌철살인의 위트와 역설을 유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속이 붙은 삶에 잠시라도 브레이크를 걸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