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여정마다 발견되는 소설의 재미
새로운 만남이 선사하는 묵직한 감동
『여기는 괜찮아요』의 작품 속 인물들은 저마다 예상치 못한 만남을 경험한다. 「상봉」의 일흔 넘은 노인 장시곤은 천신만고 끝에 이산가족 상봉 장소인 금강산에 도착한다. 태어나기도 전에 헤어져서 얼굴조차 모르는 친동생을 만나기 위해서다. 상봉에는 그의 아들과 며느리도 동행해 장시곤을 보필한다. 우여곡절 이후 만남이 성사되었는데, 형제의 외모는 닮은 듯 안 닮은 듯 아리송하다. 이윽고 양가의 가족사가 이어지는데…… 장시곤은 상봉 장소에서 친동생을 찾을 수 있을까.
그러나 갑작스럽게 인물의 삶을 침범하는 사건들은 오히려 또다른 인연이 되어 황망한 마음에 안부를 건네기도 한다. 표제작 「여기는 괜찮아요」의 주인공 ‘나’는 대학교수다. 코로나 팬데믹이 한창인 때, ‘나’는 비대면 강의를 하면서 섬에서 혼자 지내는 수강생 경진의 글쓰기 과제를 첨삭한다. 그러던 중 오래전 청산도에서 만났던 공무원 어르신 오동순씨는 기억에도 없는 책을 돌려달라며 연락해 온다. 두 사람은 ‘나’와 직접 만나본 바 없거나, 만났더라도 기억에서 잊힌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나’는 암울해 보이는 경진의 글로부터 그의 안위를 걱정하고, 오동순씨가 시간을 거슬러 터무니없는 부탁을 해온 사정을 헤아리고자 한다. ‘나’가 먼저 건네는 물음에, 두 사람은 비로소 “여기도 괜찮아요”, “아즉 여그는 청청한게”라며 화답한다(275면).
숱한 엇갈림과 상관없이 현재를 공유하는 누군가와 새로이 연결되는 감각은 소중한 사람의 난 자리를 푼푼하게 채워준다. 내력을 다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 마음만은 헤아릴 수 있다는 듯 새로운 만남이 곁에 다가앉는 모습은 어리둥절하게 유머러스하면서도 개운하게 따뜻하다.
흙과 식물처럼 어우러지는 서늘함과 유머
남아 있다는 공통감각으로부터 먼저 건네어보는 안부
『여기는 괜찮아요』의 이곳저곳에는 상실의 상황이 전제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상실이 작품에 비애를 드리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첫 작품인 「깡통」은 한몽사전 편찬 작업을 하러 한국에 온 네르귀의 이야기다. 여기서 네르귀는 몽골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몽골에서는 태명을 지어주지 않는다거나, 첫눈이 오는 날 하늘을 올려다보지 않는다는 말에 한국 연구원들은 의문을 표하면서도 신비로운 세계를 접한 양 관심을 가진다. 어릴 적 네르귀의 부모는 돈을 벌러 한국으로 왔고 네르귀는 몽골에 할아버지와 둘만 남았는데, 어느 날 여행자들이 네르귀에게 콜라 다섯 캔을 선물한다. 네르귀는 이 달고도 톡쏘는 맛에 매혹되지만, 할아버지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썩지 않는 깡통에 두려움을 느끼고 네르귀에게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울란바토르에 콜라 캔을 버리고 오라고 시킨다. 이 여정은 상실, 또다른 만남과 이어지며 소설집 전체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저자는 계속해서 떠난 사람의 자장 속에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술회한다. 「숲으로」에서 수아와 의붓어머니 금이는 아버지의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다. 아버지의 죽음은 수아로 하여금 금이의 생애를 돌아보게 만들고, 금이가 남모르게 겪어온 차별과 수모가 환상으로 분하여 수아를 찾아온다. 그런가 하면 「가족 버스」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따라가며 ‘올바른’ 애도의 방식에 의문을 던진다. 중년의 딸인 ‘나’는 어머니에게 드릴 편지를 써서 낭독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부담을 느낀다. 게다가 고2 딸 지민은 세월호참사를 추모하기 위해 팽목항에 들르고 싶다며 고집한다. 반대하던 ‘나’는 “무슨 대단한 걸 하겠다는 거 아니었”다며, “잊지 않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는(87~88면) 지민의 말에 수긍하고, 자신도 어머니에게 보낼 편지를 완성하게 된다. 애도란 거창한 일이 아니라 그저 애틋한 마음을 꺼내어놓는 일이라는 사실을 포근하게 도닥여주듯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여기에서 나아가 「조용한 생활」은 상실을 온전히 수용한 뒤에야 다음으로 갈 수 있다는 감각을 극명히 드러내는 빼어난 소설이다. 준모는 고등학생 시절을 지낸 탐매마을에 모교의 선생이 되어 돌아오게 된다. 어느 날, 주인집 허 노인이 여순사건 희생자의 학적을 찾아달라고 부탁해온다. 마을에서 언급조차 금기시되던 여순사건에 특별법이 제정되어 비로소 희생자를 찾을 수 있게 된 시점, 준모는 허 노인의 부탁을 이행하며 유일한 친구 양태민과 보낸 어두웠던 학창시절을 되짚는다. 그러면서 탐매마을에 “아직 끝내지 못한 자신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을” 깨닫는다. “기억으로 구부러진 골목을 매일같이 걸”으며 두갈래의 과거를 직면하는 사이에 흐드러졌던 홍매화는 져 내리고, 비로소 준모는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게 된다(192면).
소설은 분단, 여순사건, 세월호참사, 코로나19 등 한국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을 불러낸다. 국가적 트라우마라고 할 만한 사건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사자라기보다는 주변인이다. 그러나 같은 시간과 사회를 공유하기에 그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건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면, 그냥 잊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보면 어떨까. 우리는 아직 여기에 남았기에 먼저 간 사람들을 정리하고 기억할 수 있다. 그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잊지 않았다고 말”(「가족 버스」)할 수 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아직 괜찮”(「여기는 괜찮아요」)다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답할 수 있다.
전성태는 소설집을 펴내며 어떤 사람이 “죽어 사라”진 뒤, “겨우 그를 보낸 이야기나 쓰고 만다”고 말한다(작가의 말). 그러나 남은 사람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보낸 이야기를 다른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를 알고 그 사건을 아는 사람, 그럼에도 아직 살아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람에 대해서 곱씹을 수 있지 않을까. 애도의 직접적인 대상이 지상에 존재하지 않음에도 이야기를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 계속해서 기억을 호명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들과 같은 시간을 살았던 우리에게도 사건은 여전히 현현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전성태의 소설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멀어질 것을 알고도 다가가는 마음으로 그의 소설을 만납니다. 비워두어 선연한 그리움, 드러내지 않아 더욱 짙은 비애의 그림자, 윤슬처럼 반짝이는 아름다운 한국어와 정감 어린 방언, 이야기 자체가 발산하는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그의 소설이 이제 당신에게 묻고 있어요. 당신이 계신 그곳은 어떤가요, 괜찮은가요?”(추천사, 최진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