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을 견디며 새로운 세계를 꿈꾸는
그들에게 보내는 미적 경의
시인은 서발턴의 입장에서 서발턴의 감성을 정확하게 그려 낸다. “자학”, “자책”, “수치심”, “비굴” 같은 정서들은 하나같이 갑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을의 것이다. 이런 정서들은 한결같이 문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린다. “다 내 잘못이니까”라는 고백은 지식인 하린의 고백이 아니라 보편적 서발턴의 목소리이다. 서발턴의 목소리는 그것이 무엇이든(“주석도/ 프롤로그도/ 에필로그도”) 처음부터 끝까지 “주목받지 못”한다. “나는 나의 방식으로 안쪽을 이해했을 뿐”이라는 발언은 문제의 모든 원인을 자기 내부에 돌리고 그 너머까지 나아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서발턴의 자기 고백이다. 하린은 이와 같은 미적 허구-형식을 동원해 서발턴의 목소리를 서발턴의 한계까지 담아내며 절실하게 살려낸다. 이것이야말로 개념적 이론이 아닌 미적 형식의 살아 있는 힘이 아니고 무엇인가. 독자들은 하린의 1인칭 허구-형식을 통하여 청소년, 이방인, 노동자, 연습생, 알바생, 가장, 세입자, 택배기사들이 내는 비탄과 좌절과 치욕과 비굴과 자책과 눈물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하린이 이 시집에서 구현하는 것은 서발턴과의 미적 연대이다. 시인과 서발턴은 그들의 입을 틀어막는 시스템 안의 주변인이라는 점에서 유사하다. 시인은 지상에 끌려 내려온 “구름 속의 왕자”(샤를 보들레르_C. Baudelaire)이기 때문에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구름 너머 시인의 꿈은 늘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서발턴은 현대판 호모 사케르(Homo Sacer)이다.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 아무도 그들에게 주목하지 않는다. 그가 어떻게 되든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시스템은 그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이기를 원한다. 서발턴은 생존하기 위해 그것을 감수해야 하는데, 그 정서의 구조는 멸시와 조롱의 대상인 시인이 지상에서 감내하는 구조와 유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