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라는 수단으로 현재를 조망하고 근미래를 예견하다
「추모와 기도」는 총기 난사로 인해 희생된 한 여학생과 그 주변인들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죽은 딸을 기억하고자 온라인 조문을 연 부모에게 시작된 사이버 공격은, 급기야 죽은 딸의 시신을 가상의 영상으로 조작하여 밈화 시키면서 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긴다. 이를 막기 위한 갖은 보안 회피 방법에도 조롱은 끊이지 않게 되고, 결국 가족은 해체되고 피해자들은 더 큰 상처만 받는다. 켄 리우는 각기 인물의 인터뷰 형식으로 소설을 풀어내어 현실감을 높이는 한편, AI, 딥페이크 등을 통한 가상현실의 사이버 테러 등이 어떻게 현실에서 악용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인터넷 분탕꾼(troll)과 분탕질(trolling)은 국내에서도 최근까지 계속 큰 주목을 받아온 만큼, 켄 리우의 단편 「추모와 기도」는 본 단편집에서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다. 또 다른 단편 「비잔티움 엠퍼시움」은 몰입 체험 슈트를 통해 국제 분쟁 중 난민들의 상황을 현실처럼 느낄 수 있게 된 근미래를 소재로 하고 있다. 동정심을 자극함으로써 그 기부금을 통해 운영되는 "국경 없는 난민회"의 상임 이사인 소피아와 블록 체인 기술을 활용해 기부금을 각종 기구 등 기존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보다 투명하게 전달하는 방식의 새로운 플랫폼을 주도하는 탄젠원이라는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고통의 상품화"라는 미래 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그린다. 「진정한 아티스트」는 AI를 통해 더 이상 창작자의 고뇌와 노력이 아닌 소비자의 반응을 통해 창작물을 만들게 되는 놀라운 미래를 그린다. 이미 그림, 음악, 글을 비롯하여 다양한 문화예술 창작자가 AI로 인한 일자리 위기를 겪고 있는 현실에서, 앞으로 AI가 어떤 방식으로 발전·활용될지 켄 리우의 상상력을 통해 예견한 작품이다.
강렬한 역사 의식을 SF에 담다.
켄 리우는 소설을 집필하는 것 외에도 류츠신의 『삼체』를 영미권에 소개한 번역자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작중 중반부에 위치해 있던 문화대혁명 내용을 가장 앞에 올 수 있도록 재편집하여 서구에서 큰 성공을 거두도록 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는 「삼체」 영상화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는데, 켄 리우는 그만큼 역사, 특히 동북아시아 역사에 관해서 누구보다 큰 관심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만나볼 수 있는 켄 리우의 단편집 네 권 모두 역사를 소재로 한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첫 작품 『종이 동물원』에서는 대만의 2·28 사건을 재조명한 「파(波)」, 그리고 일본 731 부대의 희생자 이야기와 미국 정치권의 일본 로비 등을 소재로 한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들이 크게 주목받았다.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에서는 미국 골드러시 시기의 중국인을 다룬 「모든 맛을 한 그릇에」와 중국 이민자를 소재로 한 「달을 향하여」를, 『신들은 죽임당하지 않을 것이다』에서는 중국 양주에서 벌어진 청군의 대규모 학살 사건을 무대로 한 「풀을 묶어서라도, 반지를 물어 와서라도」, 조일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을 명나라의 만력제와 이여송을 중심으로 풀어낸 「북두」, 만주에 온 일본 군인들의 이야기를 다룬 「우수리 불곰」까지. 이번 단편집에서도 역시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가 겪어야 했던 차별과 박해 그리고 오키나와를 배경으로 한 일본군의 잔인한 실험을 소재로 한 「맥스웰의 악마」와 전 세계 분쟁 지역의 학살과 이에 연결된 국제 구호단체간의 커낵션을 다룬 「비잔티움 엠퍼시움」이 수록되어 저자 켄 리우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도를 대변하고 있다. 이중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들」은 각각 일본의 731부대라는 소재와 중국 공산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일본과 중국에서 켄 리우의 단편집이 정식 출간될 때 수록작에서 제외되거나 일부 삭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