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는, 시인의 1958년 개천절 경축 전국백일장 입상 작품인 「한산도」를 비롯하여 동인지 《낙강》, 《영남일보》 등에서 발표한 시조 작품과 자유시, 2·28 행진곡, 4·19의 노래 가사, 《매일신문》에 발표한 수필 작품이 모두 실렸다. 선생의 맏아들인 김용승 씨가 동분서주, 노심초사 백방으로 뛰어다니며 찾아낸 시인의 소중한 유고 작품들이다.
“뭍에도 못 오르고 강심에도 못 잠기고/ 갯벌에 자리하여 진흙에 박혔다가/ 가는 밤 외 밝은 밤에/ 그림자나 띄우자// 물새도 숨어버린 해 저문 강나루에/ 어스름 타 흐르는 여울이나 지었다가/ 빈 들녘 쇠잔한 바람을 몸으로나 울리자// 물리고 비벼대고 살아가는 세상 밖에/ 덧없는 세월이야 강물로나 흘려두고/ 그 깊이 삿대를 찔러 뗏목이나 보내자”(「갈대」 전문)
시인은 당시 사라져 가는 민족의 운율, 시조 문학에 대해 누구보다 진한 애정을 가졌다. 끈질긴 투지와 좌절, 애조가 저류에 흐른다는 평을 받는 시인의 시조는 “투박한 토기”의 정서로 우리의 “민족혼”과 “삶의 비애”, “자연의 허허로움”을 노래했다, “동강 난 이 강산에 몰아쉬는 탄식인가”(「송뢰(松賴)」), “내 조국 대동맥에 수혈하고 가신 임들”(「위령탑」), “장부라 장부라 하고 다짐도 해 왔건만/ …/ 오늘도 서투른 곡예의 줄을 타는 이 슬픔”(「세모(歲暮)」), “사랑도 영고성쇠(榮枯盛衰)도 한 장 종이의 어룽”(「은행나무」), “짚불을 지펴놓고 모기 쫓는 뒷마당에/ 어스름 스며드는 달그림자 비쳐 올 때/ 수줍어 고개 숙이며 돌아서는 아가씨”(「박꽃」) 등, 편 편이 소중하다.
또,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몇 개월 전에 매일신문 〈매일춘추란〉에 기고한 수필 작품들에서는, 병마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잃지 않았던 시인의. 세상을 향한 단순 소박하지만 깊은 성찰의 충언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 불의와 독재로 민주주의를 억압하던 시대에 사회적 인간으로 한 지식인으로 고뇌하던 시인은 역사 인식과 현실 인식이 투철하여 대구 능인 고교 영어 교사 시절에 ‘데모규제법’, ‘반공 특별법’, ‘이대 악법반대 운동’ 등 많은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시인의 올곧은 정신은 4·19 민주 의거의 고귀한 정신을 계승하는 “4·19의 노래” 노랫말을 작사함으로써 자유와 정의, 민주주의의 소중한 가치를 되새기는 역사적 기록물을 남기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자유당 이승만 독재정권에 반기를 들었던 대구지역 학생들의 기상 ‘대구 2·28 민주화운동’을 노래한 “2·28 행진곡”의 가사를 작사하는 등, 시대를 앞선 저항적 문인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연보라 피어나던 젊은 꽃송이/ 나라와 겨레의 살길을 찾아/ 총칼을 무릅쓰고 정의를 위해/ 하늘 높이 외치던 4월 19일/~/~/ 아~아~ 청사에 길이 빛날/ 거룩한 별이여 님의 별이여”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격동의 생애를 보내고 불의에 저항하며 옥고를 치르고, 천직으로 여기던 교직에서 물러나 생업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에서도 역사적 현실적 기반에 충실한 시절가조(時節歌調)를 남긴 김장수 시조 시인, 선생의 유작집 『갈대』를 통하여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하여 선봉에 섰을 뿐 아니라, 문단의 중요한 직책을 맡아 헌신하면서 창작활동을 통해 대구사회에 큰 발자취를 남”긴 한 시인의 참모습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