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한 교장 선생님이 새로 만든 교실에선 어떤 일이 일어날까?
매일 설레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던 봉암의 행복한 나날들
사람의 생애에서 배움이란 어떻게 시작해서 한 사람을 어디로 나아가게 하고, 그 사람이 속한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 것일까? 이 책은 배움의 출발점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한다. ‘공부’가 뭘 말하는 건지도 모르는 어린 시절에 어른들로부터 &공부 잘한다&는 칭찬을 받은 기억에서 출발해 참고서 하나 없이 교과서만 반복해 읽으며 모르는 문제가 있을 때는 전학 간 여자 선배에게 편지를 써서 물어보곤 했던 소년 시절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가 사범학교 원서를 구해다준 것을 계기로 교사가 된 사연 등 시골 소년이 배움에의 눈을 뜨고, 교사가 되기까지의 인연의 중요한 마디마디가 구수하게 펼쳐진다.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우연하게 교직에 들어서서 도망갈 궁리를 하던” 청년시절의 그가 ‘교사의 길’에 눈을 뜬 것은 광주에서 열린 교육과정 세미나에서 다른 교사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사람은 다른 존재와의 만남과 새로운 경험을 통해서만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관점을 달리할 수 있음을 그는 자신의 길을 돌아보며 다시 깨닫는다. 그리고 학교에 몸담고 있을 때는 하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해온 교육을 해온 지난 19년의 시간이 결국 아이들에게 교실이라는 좁은 세계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를 만나고 가정과 학교 밖 다른 어른과의 접촉을 넓혀주려는 시도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80 평생을 살며 처음 시도해보는 책쓰기를 통해서였다.
선생님도 글쓰기는 어려워
1943년생으로 충청도 시골에서 자라나 충주사범학교에 입학한 사연부터 신출내기 교사 시절의 방황, 학교와 군대에서 배움과 관련해 겪은 진솔한 에피소드, 학교라는 조직 안에서 느낀 답답함을 지나 퇴직 후 새로 아이들을 만나는 설레임을 생생하게 표현한 1장 ‘가르치지 않기’를 지나면 2장부터 5장까지는 구체적으로 아이들과 함께한 시간들이 스냅사진처럼, 단편영화처럼 그려지며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책으로 공부한 역사의 현장으로 과감히 떠나는 ‘역사 속을 여행하며’(3장)와 아이들 생각과 표현력이 자라나는 소리가 생생히 담겨 있는 ‘살아 있는 글과 함께’(4장) 챕터에서는 봉암 아이들의 활동 범위가 점점 커지는 스케일에 놀라게 된다. 더 큰 세상을 보고 더 많은 어른과 만나게 하며 아이들의 시야를 열어주는 새로 경험한 것을 글로 정리하고 발표하는 과정을 통해 사고의 깊이와 표현의 폭을 키워주려는 선생님의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새로운 시도를 향해 열려 있는 학부모들의 신뢰와 조력이 얼마나 큰 에너지로 작용하는가를 절감케 만드는 기록이다.
‘새로운 생각을 가꾸며’(5장)는 미래사회에 필요한 역량을 키워주려는 교사로서의 노력이 엿보이는 장이다. 풀어야 할 문제를 아이의 눈높이에서 호기심을 유도한다. 그러면 아이가 스스로 몰입하여 고민한다. 그리고 마침내 알아냈을 때의 기쁨에 공감하기까지 교사는 옆에서 기다린다. 배움이 온전히 아이의 것이 될 수 있도록 조바심 내지 않고 기다려주는 여유가 봉암에는 있다. 저자는 아이가 터득의 기쁨을 만나는 순간까지의 과정이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지 독자에게 자꾸 보여주고 싶어한다. 그래서 어린이의 생동하는 호기심과 창의적인 영감이 만발하는 순간들을 포착하여 전해주는 저자의 이야기 솜씨가 갈수록 노련해진다. 마지막으로 6장 ‘봉암의 시간을 돌아보며’에는 독자에게 한 장의 그림엽서를 띄우듯 교육자로서의 삶을 아름답게 갈무리한 글들이 실려 있다. 봉암교육연구실 활동을 마무리하며 책 한 권 정도는 기념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랜 시간 꾸준히 단련해온 필력의 정점을 보여준다.
교과서와 교육과정이라는 두 개의 레일 위를 벗어나
자녀가 독립해 자기 가정을 이뤄 떠나고, 교직은 은퇴해 학교와 멀어졌지만 봉암은 가르치고 배우는 삶에서 조금도 멀어지지 않으려 한다. 아니, 오히려 더 깊숙이, 본질 속으로 들어가는 여행을 계속 계획하고 실행해왔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우선 자신의 삶을 다듬어가야 한다고 말한다. 변화하는 세계에서 다음 시대의 주역이 될 아이들을 가르치려면 교육자가 계속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배우는 일을 계속하려면 사람에 대한 관심, 세상에 대한 호기심, 더 새롭고 좋은 것을 접하려는 열정이 계속 일어나는 환경 속에 자신을 데려다놓을 줄 알아야 한다. 봉암은 이러한 생각을 자신의 삶을 통해 실천으로 펼쳐냈다.
저자는 “체계적인 교과서와 정교한 교육과정에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말로 학교교육의 아쉬움을 요약하고 있다. 그 두개의 레일에서 벗어난 19년의 시간 동안 그는 어린이의 순수함을 만끽하며 아름다운 성장의 순간들을 목격해왔다. 아이들이 무심코 뱉어내는 표현들이 별처럼 반짝이는 저자의 이야기에 이끌려가다 보면 이렇게 아름다운 만남일 수 있는 교육을 우리는 얼마나 어렵게 하고 있는 것인가, 돌아보게 된다. 일방향 과속 드라이브는 멈춰야 한다.
봉암의 시간
더 큰 세상을 보고 더 많은 어른과 만나게 하여 아이들의 시야를 열어준다. 새로 경험한 것이 있으면 언제나 글로 정리하고 발표하는 기회를 마련한다. 친구들과 소통하며 사고의 깊이와 표현의 폭이 확장된다. 이런 봉암 선생님의 열정을 학부모들의 신뢰와 조력이 뒷받침한다.
입시와는 아무 상관 없지만 치열하게 공부하고, 성적 경쟁에서 자유롭지만 답을 먼저 알아내고 발표를 더 잘하려고 친구와 경쟁하며, 아무 차별이 없지만 서로의 차이를 밝혀 개성을 존중하는 봉암교실. 이런 교실이 19년간이나 자유로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바탕에 봉암 학부모가 있다. 봉암교실에서 무엇을 배우건 상관하지 않는 ‘신뢰의 방관’과 의견과 도움이 필요할 부분을 적극적으로 발견하는 ‘레고식 참여’라는, 학부모가 깔아주는 두 개의 레일이 굳게 밑받침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여정이다.
처음에 ‘봉암’은 권정언 선생님께 지인이 붙여준 아호였다. 이 이름 아래 학부모와 아이들이 모여 19년이 흐르는 동안 ‘봉암’의 이름은 점점 더 확장되었다. 아이들이 학교 파하고 찾아가는 방과후 교실,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 함께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는 특별한 관계, 졸업해 떠난 아이들이 첫 손에 꼽는 유년시절 추억의 이름이 되었다. 차별 없는 관심과 열정 그리고 시기 없는 경쟁과 몰입의 허기를 채우는 안전한 관계 속에 행복한 교육을 경험한 봉암 출신 아이들의 가슴에 자랑스러운 이름으로 점점 더 커져가는 이름이 되고 있다. 늘 새로운 설렘이 있는 교실, 두려움없이 자기를 표현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 돌아보면 늘 미소가 지어지는 자랑스러운 배움의 순간들을 일컫는 ‘봉암’의 시간이 더 오래 이어지고 더 널리 퍼지기를 바라며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