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받고 무너져버린 비밀요원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었다.
서준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아 아바나에까지 왔다.”
작전명 ‘아바나 리브레’
추락하고 배신당한 국정원 요원이 자신과 조직,
그리고 국가의 명운을 걸고 벌이는 최후의 공작!
2016년 말,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의 블랙요원, 즉 현장 요원으로 중남미와 동남아에서 활약하던 이서준은 의문의 투서로 인해 대기 발령 징계를 받는 신세가 된다. 그는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서울 연희동의 국정원 안가를 방문하고, 해외 비밀 작전 전문가인 조 부장에게 대형 프로젝트를 제안한다. 작전명 ‘아바나 리브레’.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이루어질, 이서준이 주도하게 될 은밀하고 위험한 작전이었다.
정권의 교체가 예고되던 시기, 새로운 정권의 출범과 함께 대북 정책에 있어 조직의 가시적 성과를 이루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국정원의 실세 조 부장은 이서준의 제안을 받아들인다. 단숨에 작전을 설계한 그는 국정원 뉴욕지부장 황 소장, 일명 ‘간판’을 공작관으로 삼아 이서준을 지원하게 한다.
작전 준비를 위해 뉴욕으로 간 이서준. 그는 뉴욕지부에서 암살 전문가, 지원 전문가, 첩보기기 전문가로 구성된 은퇴한 노장 요원들로부터 ‘아바나 리브레’ 작전을 위한 특별 교육을 받는다. 마침내 교육을 수료한 이서준은 아바나로 향하고, 뉴욕지부장이 건넨 파일 속 인물들을 차례로 만나 탐색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리고 드디어, 작전의 메인 타깃인 김영호와 접촉한다. 쿠바 주재 북한대사관의 영사 김영호는 북한 최고지도자의 오랜 친구이자 최고지도자의 여동생, 바로 북한의 권력 서열 2위인 인물과 연인 관계에 있는 중요 인물이다.
작전 종료 당일, 이서준은 단골 선술집을 찾아 자신을 감시하는 타국의 위장요원들 한가운데서 살인을 고백한다. 그리고 김영호에게 자신의 집에서 마지막 만찬을 함께할 것을 제안하는데…….
“나는 어디에 있는가?”
사회적 고뇌와 실존 의식 사이에서 찾은 이국의 풍경
아바나에 드리운 자유의 공기와 분단국가의 냉소적 현실이
만들어낸 반전(反轉)의 그림자와 아름다운 불협화음
의문의 투서로 인해 평생을 투신한 조직으로부터 배척당한 스파이. 그리고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배신당한 상처받은 남자.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어진 그는 이국의 기후와 땅으로 도망치기 위해 자신이 속한 조직인 대한민국 국가정보원에 한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그 담당 현장 요원을 자처하여 쿠바 아바나에 당도한다. 그러나 도피하듯 밟은 땅은 오로지 양지만이 존재하는 초현실적인 열대의 시공간이었고, 평생을 블랙요원으로서 음지에서 활동해온 남자는 빛과 그림자가 완전히 뒤집힌 듯한 세계에서 감각의 혼란을 맞는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그는 쿠바의 느른한 공기 속에서, 엿가락처럼 늘어진 시간과 공간 한가운데서 오히려 감각이 회복되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아바나 리브레》는 그렇게 세상으로부터 도망쳤던 한 남자가 강렬한 볕이 내리쬐는 몽환적 세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 명징하게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는 과정을 느릿한 호흡으로, 눅진한 촉감으로 끈질기게 그려놓는다. 흡사 그림자가 빛 가운데서 비로소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찰나를 독자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색감의 판화처럼 찍어내려는 듯이. 아바나라는 공간을 통한 이러한 인식의 변화 혹은 ‘진화’는 곧 ‘아바나의 색채’를 인식하는 순간과 같이, 남자가 가진 능력이자 저주인 공감각에의 자각으로서 실존적 자아의식에 대한 선연한 변화의 양태를 통해 뚜렷이 드러난다. 어릴 적 사고로 모르핀에 중독되어 오감이 혼란스레 엉킨 남자는 시각으로 소리를 듣고 촉감을 느끼게 되었으나, 어느덧 타성에 젖어 그러한 저주의 고통에조차 무뎌져버렸다. 그런데 아바나에 와서야 그것을 온전한 ‘감각’으로 회복하게 된 것이다.
“온전한 나 자신, 고요함 속에서 발견한 온전한 나 자신,
자신과 똑바로 마주할 수 있었던 그런 경험을 했어요, 여기 아바나에서.
감각의 확장과 혼란의 결과물은 바로 나 자신이었죠.”
《아바나 리브레》는 무너져버린 남북 관계 회복의 가망을 보였던 역사적 사건인 2018년 남북정상회담의 극적 성사에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음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의 암약이 그 이면에 있었을 것이라는 발상에서 시작된 소설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의 의도로부터 움터 최종적으로 완성된 작품은 첩보물적 발상과 소재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여러 심오한 테마를 아우르는 낯선 감각의 무언가가 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살아 숨 쉬는 듯한 묘한 매력의 이야기로 발화하게 되었다. 이는 자아에 대한 실존적 깨달음과 함께, 사적인 문제로부터 시작하여 개시된 작전이 역사적 사건으로 확장되는 서사의 흐름과 다층적으로 궤를 같이한다. 모국과 조직 내에서 개인에 불과했던 한 남자의 사적 복수심은 쿠바 아바나라는 이국의 땅에 드리운 자유의 공기 속에서 자신이 한 국가의 일원으로, 또한 그 국가에 속한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처한 현실, 즉 분단국가의 국민으로서 타성의 공기로 호흡하던 냉소적 상황을 깨닫는 시점에서 비로소 그것을 타개해야만 한다는, 비밀요원의 의무로 치환된다.
그러나 《아바나 리브레》가 가진 묘한 매력의 자장은 이러한 서사가 첩보 스릴러라는 장르물로서 갖는 클리셰의 쾌감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상충되고 상관없어 보이는 요소들이 ‘아바나’라는 배경이 가진 마력에 의해 하나로 합쳐지며 배열되고 반전되면서 쿠바를 감싼 열기처럼 쏟아지는 감각이 주는 낯선 느낌의 카타르시스일 터다. 언뜻 공감할 수 없는 주인공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시선을 겪는 생소한 경험은 소설이 가진 주제의 무거움과 가벼움의 교차, 또한 서정적인 서술과 욕설 가득하고 때론 성적 요소까지 농후한 농담을 품은 대사들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는 과정에서 일대 혼란을 일으키는 한편, 이전의 한국소설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기묘한 정서 한가운데로 독자들을 빠뜨린다. 마치 이서준의 공감각처럼 ‘아름다운 불협화음’ 속에서 온전한 감각을 회복하여 실존하는 자아를 발견하라는 듯이 말이다. 어쩌면 《아바나 리브레》는 작가가 쿠바 체류 시에 경험했던 감각의 회복을 독자들에게도 전하기 위해 쓰인 각성의 환각제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