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명순 〉
‘훌륭한 사람’이 아닌 ‘자유로운 인간’을 향하다
김명순 대표 중단편 「의심의 소녀」, 「돌아다볼 때」, 「외로운 사람들」
김명순의 데뷔작 「의심의 소녀」에는 “의심을 일으키게 하는” 소녀가 등장한다. 2년 전, 평양 대동강 근처 동리에 아름다운 소녀 범네와 할아버지가 이사를 온다. 이사 온 이유를 밝히지 않고 동네 사람들과 교류를 피하는 탓에 둘은 관심거리가 되는데, 동리 근처에 한 신사가 나타난다. 이 소식을 들은 할아버지는 갑자기 마을을 떠나고, 후에 신사가 범네의 아버지인 조 국장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범네의 모친은 “평양성 내 유명한 미인”이자 “재산가의 독녀”로 조 국장과 결혼했으나 방탕한 남편으로 인해 고통받는다. 결국 병든 몸으로 자살하고 마는데, 범네는 곧 조 국장 첩의 표적이 되어 할아버지가 범네를 데리고 떠난 것이다. 결국 조 국장의 난행으로 인해 범네와 할아버지는 계속 표랑을 해야 한다.
「돌아다볼 때」의 주인공인 소련은 신여성으로, 평양에 강연을 하러 온 젊은 이학자 효순에게 호감을 느낀다. 사실 효순에겐 은순이라는 처가 있었으니, 둘 사이를 알아챈 은순은 소련의 고모인 류애덕 여사에게 그 사실을 전하고 소련의 결혼을 종용한다. 소련의 모친은 본처가 아닌 첩이었는데, 이 피를 물려받았을까 걱정하던 고모의 뜻에 따라 소련은 최병서와 결혼한다. 최병서는 마음 내키는 대로 “계집을 상관하고” 소련을 학대하기도 하며, 병서 모친은 소련을 들볶는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소련은 “자기의 노동과 수학과 사랑”을 게을리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조선일보》 연재본에서 비극의 연원은 친모가 아니라 난봉꾼인 ‘아버지의 더러운 피’로, 소련은 ‘강철 같은 의식’과 ‘시원한 이성’에 의해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이번 책에서 원전으로 삼은 『생명의 과실』 개작본에서는 자살을 택하지 않고 결혼 생활을 이어가되 효순과의 영적 연애를 그리는 미래지향적인 결말로 끝이 난다.
「외로운 사람들」은 순희, 순철, 상철, 금희 등 최씨 가문 네 남매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소설은 특히 순희와 순철의 삶을 병렬적으로 제시하면서, 상호이해에 기반한 연애와 주체적 의지의 중요성을 피력하고 있다. 신여성 순희는 사회학자인 정택과 함께 동경으로 떠난다. 순희와 정택에겐 각각 약혼자가 있었는데, 정택의 예식을 앞두고 도피행각을 벌인 것이다. 그러나 순희는 그곳에서 또 다른 사람을 연모하게 되고, 이에 순희와 정택은 결별하고 두 달 만에 돌아온다. 한편 순희의 동생 순철은 열네 살 되던 해 할머니의 뜻에 따라 두 살 연상인 복순과 결혼한다. 그러나 순철은 여순으로 유학을 가서 만난 청국의 영락한 왕녀 순영에게 이끌린다. 조선에서 학교를 다니게 된 순영은 순철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순철은 자신이 이미 결혼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마침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의탁할 데 없는 복순을 저버리지 않기로 결심하는데, 순철만을 기다리다 낙심한 순영은 점점 병색이 짙어간다.
〈 박민정 〉
“우리가 살아갈 세상에선 선역도 악역도 여자야”
김명순 시대에 여성이 겪어야 했던 ‘절대적 외로움’을
현대 여성이 처한 ‘공포’로 써 내려가다
「천사가 날 대신해」는 친구의 죽음을 톺아보는 ‘나’의 시선으로 시작되는 소설이다. ‘나’는 오랜 동창생 세윤의 기록을 들여다보는 중이다. 함께 보기로 한 JLTP 2급 시험을 일주일 남겨놓고 세윤은 사라져버렸다. 2년 전 이혼을 하고 새롭게 직장 생활을 하면서 남기기 시작한 세윤의 일상 브이로그. 그런데 영상에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면까지 빠짐없이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과거 ‘나’의 학교 후배이자 현재 세윤의 직장 동료인 로사. 로사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걸 알았던 ‘나’는 세윤에게 로사를 조심하라고 경고하지만 세윤은 ‘나’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세윤은 죽기 며칠 전부터 계속 악몽에 시달린다고, 악몽에는 늘 로사가 등장한다고 말했다. 브이로그를 전부 다 돌려보고, 특히 로사가 나오는 장면을 유심히 들여다보지만 ‘나’는 지금 어떠한 새로운 진실도 찾아낼 수 없다.
「천사가 날 대신해」는 “온전히 애도되지도 의미화되지도 못하는 여성의 죽음”이 얼마나 “일상화, 보편화되어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박인성 평론가) 김명순의 소설에서 세상과 남성으로부터 이중의 소외를 받았던 여성들은 자신의 존재를 이해받지 못하는 절대적 고독 속에서 ’죽음’에 이르렀다. 그리고 박민정의 소설에서도 여전히 여성은 이중의 소외 속에서 ‘죽음’에 이른다. 다만 여성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원인은 이제 더욱 정교하고 복잡해져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조차 어려워진다. 더욱이 작가는 그 원인이 특정한 외부 맥락 속에 있을 뿐 아니라 나 자신, 즉 ‘우리 내부’에 있을 가능성까지도 짚고 있다. 그것이 박민정이 바라보는 현대 여성이 처한 공포이기도 하다.
“김명순의 그 철저한 작가정신을 계승하기 위해서
그의 작품은 끝없이 읽혀야 한다”(박민정)
김명순에게는 늘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동시에 당시 문단과 사회로부터 학대를 받았다는 설명이 따라온다. 그는 소설뿐만 아니라 시와 희곡, 수필 등 170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그에게는 몹시 ‘사나운 세상’이었지만, 굴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었던 것이다. 박민정 작가는 이번 에세이에서 김명순 작가의 생애에 대해 말하고 해석하는 방식과 또 이를 작품에까지 개입하는 방식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작품 안에서 자신의 인생이 짓밟히는 ‘소외’와 ‘상실’을 정확히 예측하고 있으면서도, 바로 그 점 때문에 ‘전략적으로’ 자전적 글쓰기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철저한 작가정신을 기리고 있다. 김명순 작가가 한 인간으로서 느꼈을 외로움을 우리는 겨우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온전히 그리고 끊임없이 읽히기를 기대한다. 김명순 작가의 옆, 아주 가까운 곳에 나란히 날을 세운 박민정 작가의 글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