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신의 종말〉(1987)이라는 책을 쓴 앨런 블룸(Allan D. Bloom, 1930~1992)은 ‘이 학생에게 우리가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해 보려는 것 자체가 이미 철학적 사색이고 교육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물음에 대한 유일하면서도 진지한 해결책은 훌륭한 고전 작품을 읽게 하는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고전 작품을 읽고 토론하게 하는 수업을 진행하면 학생들은 자신들이 독립적이고 충족할 만한 그 무엇을 하고 있다고 느끼며, 다른 곳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읽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동료 학생들과 토론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고 자신을 확장해 가는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에서 〈교양교육의 개혁〉(1966)이라는 책을 썼던 다니엘 벨(Daniel Bell, 1919~2011) 또한 고전이 담고 있는 위대성의 긴장된 충격을 직접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교육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우리의 교육 현장을 돌아봅니다. 우리는 문학 작품을 왜 읽게 하고 가르칠까요? 작가가 누구이고 작품의 주제가 무엇이며, 특정 부분에 사용된 수사법이 무엇인지를 찾아내 답을 맞힐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읽게 하고 가르치는 것인가요? 다들 아니라고 하겠지요. 그렇습니다. 문학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사물이나 현상, 문제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갖게 하고,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사실이나 사실 이면의 진실에 눈뜨게 해준다는 데 더 큰 의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주고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학인 것입니다. 문학은 우리가 사는 사회와 세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다시 들여다보게 해주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여러 개의 렌즈를 갖출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문학인 것이지요. 때로는 말로는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섬세하면서도 조심스러운 감정의 호흡, 어휘 하나에 담겨 있는 엄청난 배려와 무게에 놀라게 되고 깊이를 알 수 없는 감동에 젖어 들게 하기도 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그런 기쁨과 희열을 함께 하고 고뇌와 고통을 함께 나누면서 작가와 함께 웃고 시인과 함께 눈물 흘리며 작품 속 인물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함께 분노하기도 하는 것이 문학 작품을 읽으면서 경험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 아니겠습니까? 나아가 그러한 작품을 창조해 낸 시인과 작가의 문제의식과 상상력, 마음 씀씀이 하나하나에 자신도 모르게 젖어 들면서 닮아가기도 하지요. 어쩌면 그것이 문학 작품이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학을 읽고 배우는 목적이 있다면, 그런 과정을 직접 경험하면서 우리 자신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는 안목을 고양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요? 어찌 문학 작품을 읽는 것이 문제 하나 더 맞히고 점수 몇 점 더 받기 위한 것이겠습니까?
이처럼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함으로써 인간과 사회를 더 넓고 깊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교육은 소크라테스가 말한 ‘성찰하는 삶’을 살게 하는 데에도 기여할 것입니다. 2018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미국의 세인트존스칼리지 파나이오티스 카넬로스(Panayiotis Kanelos) 총장은 전공과 시험도 없이 4년 동안 고전 200권을 읽게 하는 것이 교육의 전부인 세인트존스칼라지가 미국의 수많은 대학 가운데 가장 미래지향적이며, 가장 미래에 잘 대비된 교육을 하는 대학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면서, 이를 일러 ‘리버럴 아츠의 역설(liberal arts paradox)’이라고 한 바 있습니다. 검색을 통한 파편적 지식의 획득 대신 고전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게 하면서 스스로 발견하고 깨닫도록 하는 교육은 학생의 내적 성숙에 기여하고 자신의 삶을 평생 이끌어갈 에너지의 원천을 축적하게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