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 노동자부터 학위 취득에 경도된 문학 연구원까지
집요하고 날카롭게, 때론 따뜻하게 현실을 직조해 내는 신예작가의 ‘관계의 물리학’
작가의 특기로 보이는 “특정한 관념에 대한 다양하고 구체적인 서사의 변주”(259쪽, 작품해설)는 〈천체물리학 궤도상의 사랑 좌표〉에서도 쉽게 포착된다. 물리학의 이론을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입해 보는 이 소설에서 작가는 ‘한재하’라는 인물을 통해 지적 탐구를 시도한다. 결국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한 단계에 이른 그는 로슈한계(모행성의 중력에 큰 영향을 받는 위성이, 파괴되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한계)에 이르고 만다. 소설 속에서 서술되는 물리학 이론이나 철학적 서술은 이성적 진리에서 답을 찾고자 하는 주인공의 바람이지만, 변수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삶에서 이러한 시도는 부질없는 짓이다. 결국 주인공은 이론을 바꿔가며 탐구를 계속 이어나가야 할 운명에 처한다.
현재 부재한 큰누나의 존재감을 ‘나’와 작은누나 ‘온소’의 소원한 관계를 통해 다룬 소설 〈시소〉 또한 물리학 운동에 기반한다. 말로 풀어낼 수 없는 갈등을 겪고 있는 둘의 관계는 아슬아슬한 시소 타기를 하듯 이어지고, 작가는 소설 말미에 이르러서야 갈등의 발단을 짐작할 수 있도록 슬며시 던져준다.
어느 날 공사장에서 기다란 철근에 의해 가슴에 구멍이 뚫린 청년 노동자의 이야기를 다룬 〈우리는 깊어서〉와 오래전 절필 선언을 한 중견작가가 다시 필력을 얻자 그를 기어코 죽이려는 젊은 연구원의 이야기를 다룬 〈문학의 정수〉는 “작가 본인이 작품을 쓰는 행위에 대한 메타소설”(265쪽, 작품해설)처럼 보인다. 이 외에도 어린 시절 실종된 아버지가 유골함에 담겨 돌아오는 사건에서 이야기가 시작되는 〈포튈랑〉, 계약직 노동자들의 불안을 담고 있는 〈빌어먹는 사람들을 위한 시선집〉, 밤 근무를 서며 밤새 무슨 일이든 일어나길 바라는 경비원의 이야기를 다룬 〈끝없이 이어지는 긴 담배와 하얗게 내려앉은 밤〉에서는 현실을 인식하고 날카로우면서도 따뜻하게 이야기를 직조해 내는 신진작가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우리 시대 청춘들이 인지하는 세계에 대한 감각적인 탐구
이번 첫 소설집을 출간하며 작가는 “아직 내가 가진 것의 백분의 일도 꺼내놓지 않았다”는 호기로운 소감을 남기고 “더 이상 별일이 일어나기 쉽지 않는 세상 앞에서 소설을 쓰기 위해, 메울 수 없는 구멍 앞에서 고통을 느끼며 동시에 담담히 그저 타자를 치는 일에서 시작하겠다”고 다짐한다. “작가의 불안은 무엇인가 질문하고 또 질문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그의 불안을 신뢰하고자 한다”(267쪽, 작품해설)는 오영진 평론가의 말처럼, 신예작가의 다음 행보를 기대하며, 신뢰를 보내고 싶다.
박하신의 첫 소설집 《여기까지 한 시절이라 부르자》는 우리 시대 청춘들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고 감각하는지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탐구가 인상적인 책이다. 또 대부분의 작품들이 물리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특징이 돋보인다. 전혀 접점이 없을 것 같은 물리학과 순문학을 작가가 어떻게 직조해 나가는지 관찰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작가는 그러한 탐구를 서사의 동력 삼아 스타일리시한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맺는 관계의 물리학을 독자 스스로 느껴보고 대입해 보면 보다 흥미롭게 작가의 작품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참신한 물리학적 탐구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발전해 나갈지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