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이라는, 바깥의 깊은 고독을 아는 시인이 펼치는
시와 신앙이 맞닿은 지점의 서정과 사유
아무리 묻고 고민한다 해도 적절한 답을 구할 수는 없을 것임을 우리는 안다. 고통스러운 상황에 놓였을 때 분노하고 탄식하는 것은 마땅히 필요한 노릇이지만, 그것이 과도한 격정이 되지 않도록 슬픔을 다스리는 것도 필요하다. 분노와 탄식 이후,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도록 단정함을 유지하는 것, 그것이 시인이 수행해야 하는 바인지도 모른다. 어떤 면에서 이는 세계의 아픔을 대속하는 시인의 역할과 유사한 맥락처럼 보인다. 아이를 잃을지도 모를 어미의 고통, 반대로 어미를 잃은 자식의 슬픔과 “지붕을 잃고 싶지 않아” 그저 “가두고 지키는 일에 생을 걸”어온(「설합」) 이들의 불안 등 이러저러한 아픔에 공감하고 그 곁에서 함께 앓는 존재로서 김휼 시인이 『너의 밤으로 갈까』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바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김휼 시인은 ‘나’를 “너의 밤으로” 데려가고자 한다. 이는 골목이 너와 내가 함께 공유하는 삶인 것처럼 ‘너의 밤’이 ‘나의 밤’과 다르지 않아 그것을 공유하고 나누고자 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물론 이때 주체는 타자와의 차이를 분명히 하여 타자를 주체에 귀속시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섣불리 타자와 주체를 동일시할 경우, 그것은 환대가 아닌 연민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존재 방식에 따라 끓는점이 다르다는 것”을, “허기질수록 뜨거워지는 이쪽의 방식과/ 점유할수록 서늘해지는 저쪽의 방식이 대치하고 있는 담장”을 인식하고 “길의 어깨에 기대어” 사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일요일엔 차를 즐겨요」). 김휼 시인이 시집 『너의 밤으로 갈까』의 여러 시편에서 재현한 바가 바로 이러한 사유에 기대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죽음의 이미지를 재현하면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구체적 슬픔의 안쪽을 반복하여 내보임으로써 ‘너의 밤’, 즉 타자의 고통을 함께 앓는 시인의 시적 윤리가 그것이다. 나아가 “떨쳐 내지 못한 어둠”을 어쩌지 못한 채 “구두점을 찍”어(「구두점을 찍고 싶은 계절」) 끝을 맺기보다는 함께 어둠과 밤을 앓음으로써 “또 다른 시작으로 가는 길의 끝에서// 흘러내리는 결론을 붙들어 앉히고// 구름을 벗어난 하늘 위의 하늘”(「흘러내리는 결론을 붙들어 앉히고」)을 바라보고자 한다. 그리하여 김휼 시인의 시는 구두점 없는 앓음을 지속해 나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안으로 닫아건 상처들이 한번에 왈칵 쏟아질 것도 같은”, 그래서 “범람하는 슬픔을 가두고 글썽이는 눈동자”(「달 정원」)로 “빈 잠을 굴리는”(「나는 빈 잠을 굴리는 사람」) 김휼 시인의 시가 아프게 읽히는 건 그 때문이리라. “부디, 가는 길이 아름다울 수 있길/ 뜻을 얻고 무사히 멈출 수 있길”(「구두점을 찍고 싶은 계절」) 바라는 마음을 시인의 곁에 덧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