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성은 1986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그동안 2권의 연작소설집을 펴낸 김종성의 세 번째 연작소설집 『가야를 찾아서』는 액자식 구성(frame narrative)을 도입해 ‘바깥 이야기’로 「가야를 찾아서」와 「가야를 위하여」를 배치하고 ‘안 이야기’로 「님의 나라」ㆍ「가락국」ㆍ「검(劍)과 현(弦)」을 배치했다. 이 소설집에서 우리는 많은 인물의 삶과 그 궤적을 만나게 된다. 「가야를 찾아서」는 밥벌이를 위해 광고 영업을 하러 구두 뒤창이 닳도록 뛰어다니면서도 가야사에 미쳐 있는 한 사내의 일상을 묘사한다. 「가락국」은 가락국이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끼어 한나라를 따랐다가 흉노를 따랐다가 하다 타클라마칸사막의 모래 속에 묻혀버린 누란(樓蘭)과 같은 운명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가락국의 존립을 위해 분투하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모습을 그린다. 그런가 하면 「님의 나라」는 가야 고분을 발굴하여 고고학 자료가 출토될 때마다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학계와 언론의 허구를 잡지사 기자의 눈을 통해 그린다. 「검(劍)과 현(弦)」은 백제와 신라의 침략에 맞서 가야 소국들이 존립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현(弦)으로 상징되는 우륵의 예술이 검(劍)으로 상징되는 성왕ㆍ진흥왕ㆍ가실왕의 정치에 맞서는 서사를 그린다. 「가야를 위하여」에서는 서울로 가서 공부해보겠다는 꿈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탄광촌에서 몸부림친 지 15년 만에 34살의 나이에 대학 사학과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은 사내가 “긴 고통의 시간을 이겨내게 한 것은 역사서였다”고 술회한다.
김종성은 이와 같은 작품에서 탄탄한 묘사력과 풍부한 어휘력을 구사하면서 시대적 삶의 본질과 진실에 대한 굳건한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참으로 일독을 권할 만한 뜻깊은 소설이다.
연작소설 『가야사를 찾아서』는 현대(「가야를 찾아서」)와 현대(「가야를 위하여」) 사이에 고대(「가락국」)ㆍ현대(「님의 나라」)ㆍ고대(「검과 현」)를 시간적 배경으로 하여 창작한 작품을 배치하고 있다.
단편소설 「가야를 찾아서」의 화자 ‘나’(민기오)는 광고회사 사원이다. 사학과를 졸업한 ‘나’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밥벌이를 위해 들어간 곳이 대성기획이라는 해외광고 대행업체이다. 광고회사인지라 고객과 고객사를 찾아 구두 뒤창 수십 개가 닳도록 돌아다닌다. 명동에서 여의도로, 여의도에서 명동으로 고객사를 찾아 돌아다니면서 ‘나’는 자신이 밥벌이를 위해 뛰어다니다 닳아빠진 구두 뒤창 신세와 같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광고 회사 사원 ‘나’의 구두 뒤창은 가야사로 상징되는 낭만과 열정의 세계와 대척적인 지점에 있다. 더구나 광고회사 사원인 ‘나’는 「가락국」이라는 중편소설을 쓰겠다는 불씨 하나를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서 일상에 함몰되어 몇 년째 작품을 쓰지 못하고 있는 소설가이기도 하다. 밥벌이를 위해 광고 영업을 하러 구두 뒤창이 닳도록 뛰어다니는 ‘나’는 가야고분에서 나온 오르도스형청동솥에 빠져 있다.
“가야 문화에 미친 사나이 민기오와 광고회사 사원 차장 민기오란 별개의 인물일까. 이런 물음 속에 이 작품의 묘미가 깃들어 있습니다. 실상 이것이 작가의 만만찮은 역량인 셈인데, 자연스러움이 그 증거. 한 인간에 있어 일상적 삶과 이와는 별개의 그가 품은 이상적 삶이란 가끔은 겹칠 수 있는 것. 이 교차점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견디게끔 하는 그 무엇이 아닐 것인가. 가령 업무차 만난 왕씨는 광개토왕 비석에 미친 사나이였는데, 가야사에 미친 사나이와 족히 맞설 수 있었다(김윤식, 「역사에의 열정과 그 근거-김종성」, 『90년대 한국소설의 표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4, p.275)”라는 평가를 받은 「가야를 찾아서」의 화자 ‘나’는 가야에 미친 사나이로 소설을 쓰겠다는 불씨 하나를 가슴 속에 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 함몰되어 있다가, 소설을 쓰지 못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벗어나 중편소설 「가락국」을 완성한다.
중편소설 「가락국」은 『가야를 찾아서』의 ‘안 이야기’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주요 등장인물은 허황옥과 수로왕이다. 「가락국」은 허황옥이 인디아의 아유타국을 떠나 수로왕을 찾아가는 기나 긴 여정과 허황옥과 수로왕이 가락국을 성장시켜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교역의 중심지로 떠오른 가락국은 물길과 바닷길의 중심부에 해당하는 관문을 차지해 물길⸱바닷길 교통, 그리고 교역의 요지로서 한반도 남부의 소국들 가운데 맨 위층에 자리잡게 되었다. 말하자면 철과 물길과 바닷길이 풀무질한 교역의 거점인 가락국은 천구(天球) 위에 구름 띠 모양으로 길게 분포되어 있는 수많은 천체(天體)의 무리인 은하의 중심부처럼 변한(弁韓) 정치집단의 중심부가 된 것이었다. 관문사회의 중심 세력이 된 가락국은 황산하를 사이로 두고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소국들의 움직임에 늘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동북쪽의 사로국 세력이 황산하를 향해 침투해오는 것도 문제지만, 서쪽의 안야국과 서남쪽의 고자미동국의 움직임도 예사롭지 않아 군사력을 키우지 않을 수 없었다. 수로왕과 허왕후를 시작부터 끝까지 서사구조의 중심에 두고 도도히 흐르는 장강 같은 서사가 전개되는 「가락국」에서 작가가 힘을 들인 것은 두 마리의 물고기가 마주 보고 있는 문양인 쌍어문의 묘사다. 쌍어문은 『가야를 찾아서』의 프롤로그 같은 단편소설 「가야를 찾아서」에도 묘사되어 있다. 그리스의 시인 호머(Homer)의 대서사시 「오디세이(the Odyssey)」의 주인공 오디세이처럼 모험의 여행을 떠난 허황옥의 여정은 쌍어문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허황옥 일행이 쌍어문과 함께 떠난 여정은 아유타왕국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김해에 이르렀고, 수로왕의 조상 일행이 쌍어문과 함께 떠난 여정은 파미르고원에 위치했던 대원(大宛)에서 시작하여 중국을 거쳐 김해에 이르렀다. 허황옥과 수로왕은 가락국이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 끼어 한나라를 따랐다가 흉노를 따랐다가 하던 누란(樓蘭)과 같은 운명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수로왕과 허황옥의 딸인 묘견은 바다가 가락국의 생명줄이고, 바다는 어머니처럼 온생명을 품어 준다고 생각했다. 묘견이 새로운 쌍어문을 찾아 왜로 향해 모험의 여행을 떠나면서 「가락국」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중편소설 「님의 나라」는 가야고분을 발굴하여 고고학 자료가 출토될 때마다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는 우리나라 사학계와 언론의 허구를 잡지사 기자인 ‘나’의 눈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님의 나라」는 『가야를 찾아서』의 구성에서 ‘안 이야기’이면서 ‘안 이야기’ 「가락국」과 ‘안 이야기’ 「검과 현」을 이어주는 중간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광고회사 사원이었던 ‘나’는 회사가 경영난에 봉착하자, 역사교양 잡지인 역사문화사의 기자로 전직한다. ‘나’는 취재를 하러 다니는 과정에서 북성대학 출신의 학자들과 남성대학 출신의 학자들이 광개토왕의 남정(南征), 임나(任那)의 지명 비정 등을 둘러싸고 암투에 가까운 대립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뿐만 아니라 ‘나’는 임나일본부에 대한 한국 학자들과 일본 학자들의 시각차를 국제학술회의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나’는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잡지사 생활을 하면서 창작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써서 우륵이라는 걸출한 음악가를 주인물(main character)로 하여 중편소설 「검(劍)과 현(弦)」을 집필한다. 가야사 국제학술회의에 같이 참가했던 사람들과 식당에서 모임을 갖던 중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획기적인 유물이 경상남도 함안에서 남성대학 고고학 연구소 발굴단에 의해서 발굴되었다는 뉴스가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온다. 텔레비전 화면에 마리산 고분군이 속살을 드러내자, 말갑옷이 화면에 나타났다. 말에까지 갑옷을 입히는 집단이 4세기대에 한반도 남부에 실재하고 있었다는 것은 임나일본부설을 부정하는 획기적인 자료입니다. 현 교수의 목소리가 텔레비전 화면에서 흘러나온다. 그때 김우민이 가방을 어깨에 매며 “언제까지 임나일본부설이 허구임을 증명하고 있을 겐가”하고 툭 던지듯이 말한다.
중편소설 「검(劍)과 현(弦)」은 지금의 경상남북도 일원과 전라남북도 일원에 자리잡고 백제와 신라의 침략에 맞서 가야 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던 시기인 서기 500년부터 562년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검(劍)으로 상징되는 성왕ㆍ진흥왕ㆍ가실왕의 얼굴 맞은편에 현(弦)으로 상징되는 우륵의 얼굴이 부조되어 있다. 6세기라는 격동기를 살아갔던 우륵은 음악을 통해 가야 소국들을 하나로 통일하려고 했던 가실왕의 “모든 나라의 방언도 각각 서로 다른데, 성음(聲音)이 어찌 하나일 수 있겠는가”라는 뜻에 따라 12현금(絃琴)을 만들고, 가야금 연주곡 12곡을 지었다. 가라가 어지러워지자, 551년(진흥왕 12년) 가라에서 신라로 망명한 우륵은 세 제자에게 자신이 지은 12곡을 가르쳐주었다. 우륵이 작곡한 12곡을 배운 세 제자는 12곡이 번잡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르지 못하다고 판단하여 5곡으로 줄여 버렸다. 이 소식을 듣고 제자들로부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아 매우 화를 냈던 우륵은 세 제자들이 줄인 5곡을 듣고 난 뒤에 “즐거우면서도 지나치게 즐겁지 않고, 슬프면서도 지나치게 슬프지 않구나. 이것이 정말 바른 음악이로구나”라고 말했다. 가야금 곡은 진흥왕에 의해 신라의 궁중음악이 되었다. 정치와 예술의 대립구도 속에 서역의 누란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던 가야 소국에서 음악 활동을 하였던 우륵은 신라에서도 정착하지 못하고 안개를 헤치고 당항성을 향해 떠난다.
단편소설 「가야를 위하여」는 『가야를 찾아서』의 ‘바깥 이야기’로 『가야를 찾아서』의 에필로그 같은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28년만에 왕삼종의 전화를 받는다. 그는 ‘나’가 광고회사에 근무할 때 찾아온 사람이었다. 그는 현재 중국 변강민족연구소에서 『변강민족과 쌍어문』이라는 책을 편찬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통화가 끝나자, ‘나’는 가야사 학술회의가 열리는 서현대학교 인문대학 강의동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집어 탄다. ‘나’는 택시를 타고 가면서 어릴 적 일을 떠올린다. 교감선생으로부터 “역사책 속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인물들이 세상을 살아가던 모습은 너가 이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는 데 큰 도움을 줄 거야”라는 훈화를 듣고, 초등학교를 졸업한다. ‘나’는 가정형편으로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탄광의 검탄부, 공사장 노동자 생활을 하며, 독학으로 중ㆍ고등학교 과정과 초급대학 과정을 마치고 대학 편입학 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한다. ‘나’는 하루 12시간 곽삽으로 석탄을 퍼서 10톤 트럭에 싣는 노동으로 인해 온몸이 바늘로 찔러대는 듯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서울로 가서 공부해보겠다는 꿈을 가슴 한구석에 품고 탄광촌에서 발버둥쳐온지 15년만에 34살의 나이에 대학 사학과에서 공부할 기회를 잡는다. ‘나’가 긴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게 한 것은 역사서였다. ‘나’는 대학 졸업 후 여러 회사를 거쳐 역사인물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가야사 학술회의에 참석한 ‘나’는 『일본서기』에 나오는 지명인 기문국ㆍ대사국ㆍ다라국이 우리나라 역사서 어디에 나오냐면서 강단 사학자들을 친일학자라고 비난하는 재야 사학자들의 모습을 목격한다. 다음날 아침 일찍 왕삼종이 전화를 해서 “‘상사문(上巳文)’이 아니고, ‘상기문(上己汶)’이라고 선명하게 나온 「양직공도」 백제국사전 필사본이 실린 책을 연구소 자료실에서 찾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