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의 이해와 역사의 매력
『역사를 읽는 법』은 다른 색깔로 비칠 수 있는 두 가지 목표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역사의 매력을 알려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 용어와 개념을 보다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정보의 암기에서 벗어나 다양한 사료를 통해 낯선 과거와 만나고 소통한다면,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바라본다면, 두 가지 과제가 결코 다른 길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개념을 분명히 한다는 것은 개념을 자신의 언어와 표현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과거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된 낯선 언어와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줄곧 질문을 던진다.
광주교대에서 예비 교사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저자는 학생들과의 수업에서 “고조선의 영토를 그려보라”는 질문을 던지고, “국경은 무엇인가?” “근대적 국가 개념에 입각한 영토 개념을 고조선의 역사에 적용할 수 있는가?”라며 질문을 이어간다. 질문은 책 곳곳에서 등장한다.
“역사학에서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불가역성’에 관한 논의가 있다. 그렇다면 20세기 초반의 ‘파시즘’은, ‘홀로코스트’는 다시 되풀이되지 않을까?”
“5. 18의 원인은 5. 17일까, 12. 12일까? 혹은 10. 26일까? 아니면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 독재일까?”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이지 않았다면, 전두환의 쿠데타와 5. 18은 없었을까?”
이러한 ‘역사적 가정historical if’ ‘역사 추체험’을 통해 인물과 사건, 시대를 좀 더 풍부하게 읽어내자고 제안한다. 즉, 역사적 상상력을 통해 시대를 읽어내며 ‘역사적 사건의 원인과 결과’ ‘우연과 필연의 관계’ 등을 되짚어, 개념을 단단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인간의 이야기와 다양한 사료를 읽어내는 관점과 맥락
『역사를 읽는 법』에는 많은 역사적 인물이 등장한다. 왕건, 세종, 고종 등 익히 알려진 왕부터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앞장선 김구, 안중근, 신채호, 안창호, 그리고 현대의 전태일까지. 물론 그들의 일대기를 다시 서술하지는 않는다. 견훤과 궁예에 비해 군사력도 세력도 두드러지지 않았던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리더십과 포용성을, 세종이 찬란한 업적을 쌓는 데 뒤에서 힘이 돼주었던 태종의 조력을 주목하면서 맥락 읽기를 강조한다. 또한, 김구와 이승만, 이광수와 최남선과 홍명희를 묶어서 살펴보며 시대의 갈림길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지, 그 의미는 무엇인지 묻는다.
나아가, 안중근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꾀했던 우덕순의 이야기, 이재명과 함께 이완용 암살을 도모했다가 공소시효가 얼마 남지 않았던 때에 15년 만에 잡힌 이동수의 이야기, 2인자의 위치에 있었지만 자신만의 길을 걸었던 이관술과 스다카이, 자로 등 잘 알려진 역사적 사건 속에서 가려져 있던 인물들을 길어올리며, “잊어서는 안 되는 존재를 기억하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라고 다짐하기도 한다.
인물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저자는 다양한 사료의 활용을, 사료 선택과 활용 시 시대적 맥락을 살피며 읽어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컨대, 일제강점기에는 고려 말에 피해를 끼친 ‘왜구倭寇’ 대신 ‘해구海寇’라고 표현했으며 임진왜란에 관한 서술도 쉽지 않았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에 쓴 글이나 책을 해방 후 다시 출판할 때는 책의 서술 내용을 다시 살펴보아야 한다.
또한, 이미지 안에 숨은 상징을 읽어내는 것도 강조한다. 일례로, 비누를 사용한 흑인 아이가 흰색으로 변한다는 내용의 비누 광고를 통해, 서구의 근대와 식민지의 근대는 선악, 강약, 백과 흑, 깨끗함과 더러움 등으로 대비되었음을 읽어내고, 최근까지도 이어져온 사례를 언급한다.
이렇듯 저자는 인물 이야기와 다양한 사료를 짚어가면서 ‘사료의 선택과 활용’ ‘개념의 번역과 해석, 검열’ ‘역사의 서술’ ‘다양한 해석과 관점’이라는 역사학의 방법론을 살펴본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
『역사를 읽는 법』은 ‘기원과 시대착오’ ‘시대적 맥락과 시기 구분’ 등 역사의 시간 개념을 다시 생각해보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역사학은 조각나고 시간적으로 단락이 존재하는 사료를 연결시켜 이야기를 만드는 학문이기에, 과거를 살피는 동시에 현재의 물음에 답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기 때문이다.
멀지 않은 세대 간에도 나타나는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 저자는 현대사 관련 수업을 할 때를 예로 든다. 1987년 6월 항쟁에 관한 수업을 할 때, 가르치는 이에게 1987년은 직접 경험한 시대인 반면, 배우는 이들에게는 아직 태어나기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즉, 선생에게는 과거의 ‘경험’이고 학생들에게는 과거의 ‘역사’라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신을 기준으로 태어나기 이전의 사건을 역사로 이해한다. 20살의 나이에 1987년을 겪은 이들에게 1950년 6. 25 전쟁은 37년 전 역사이고, 2024년 20살인 이들에게는 1987년 6월 항쟁이 37년 전 역사다. 역사를 대할 때는 세대마다 이해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반면, 최근 우리는 과거 제국을 경험했던 국가들에서 급진적인 세력들이 일으키는 폭력 사태를 자주 접하게 된다. 저자는 ‘과거의 부활’이라는 영광에 매달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지적한다. 화려한 영광을 부활하자면서, 당대의 모순을 감추고 타자에 대한 공격성을 높인다는 것이다. ‘라떼’로 대표되는 일상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듯 황금기를 과거로 설정해 불행하고 비참한 당대가 대비되었다. 과거가 현재를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심지어 미래까지 위험할 수 있다.”(353쪽)
결국 역사는 당대의 과제, 즉 현재성의 물음을 해결해야 하기에, ‘역사적 교훈’ ‘역사의 현재성’ ‘역사교육과 상상력’을 살펴보며 역사 공부의 의미를 새겨봐야 한다.
의미를 새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