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엿보기
오늘 우리가 마주한 서이령의 시집,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에서 시인은 무언가에 깊이 탐닉한 주체를 내세워, 우리로 하여금 그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만든다. 차갑고 무정한, 파편화되어 흩날리는 동시에 주체를 진득한 기억의 늪으로 빠뜨리는 이 세계는 우리와 동일한 객관적 세계이면서 탐닉하는 주체에 의해 주관화된 세계라는 점에서 이채로움을 발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 번째 출구에서 우리는」의 시적 세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 주체의 눈에 의해 세계는 어떻게 의미화되는가. 그리고 이 말은 그의 세계가 쉽사리 요약될 수 없는 감정과 감각, 이를테면 사랑의 편린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모순적인 요약(불)가능성을 파고들기 위해, 우리는 다음의 시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꽃, 메시지 그리고 너
소낙비가 내리는 창문이 그리워져서
눈을 감는다
빛이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네가 왔다 가는 것이 보이지만
문을 열면 무너질 것 같아서
(삭제)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는 너
먼 곳에 사는 너
한잔할래 허공에 잔 부딪치는 소리
들려
마음을 보여주겠다고 환하게 웃으며
내놓았던 꽃다발
(삭제)
하현달처럼 기울어가는 너
꽃잎 시들다가 떨어지고 있는데
기다리는 것도 한자리
술잔을 채우는 것은
찌르레기 울음소리로 남고
(삭제)
기억 속에 있는 너
술잔 속에 비친 나를 건져 올려 보아도
잊지 못하겠지 너를
(삭제)
지워도 지워도 다시 그 자리
- 「Delete」 전문
직설적인 화법이 부각되는 위의 시에서 화자는 자연물과 언어, 그리고 탐닉의 대상을 하나의 문장에 나열하며 시를 시작한다. 시는 그러한 나열과 상관적으로 자연물-언어-대상의 연쇄를 통해 정서적 이미지를 형성한다. 마치 화자가 지닌 기억 속의 편린인 것처럼 느껴지는 각각의 연은 개별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이 이미지들은 서사적으로는 연관관계가 없음에도 정서적인 유사성을 통해 마치 한 사람의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일으킨다. 화자는 이러한 이미지의 연쇄 속에서 거듭 “(삭제)”를 해나가지만, 이는 결코 완결되지 않으며 시 또한 끝나버리고 만다. 아마도 이 시를 읽은 독자라면 어렵지 않게 화자의 삭제라는 행위가 계속해서 이어지리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지워도 되살아나는 기억 속에 놓인 화자, 이것이 바로 이 시집을 관통하는 화자의 공통 속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는 이처럼 지울 수 없는 기억, 혹은 과거가 되어버린 사랑의 현실로 인해 고통받고 있으며, 그러한 고통은 화자로 하여금 자신의 눈에 비친 모든 사물을 그러한 사랑과의 연관관계를 통해서 의미화하도록 만들고 있다. 예컨대 시에 등장하는 사물의 명칭들, “소낙비”, “창문”, “빛”, “문”, “잔”, “꽃다발”, “하현달”, “꽃잎”, “찌르레기”의 울음소리와 같은 것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객관적 현실 속에 위치한 사물들 그것이면서, 동시에 그것이 아니기도 하다는 이야기이다. 왜 그런가? 주체의 현실 속에서 그러한 사물은 잃어버린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너’와의 연관관계를 통해서만 그 의미가 부여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객관적 현실과 주관적 현실의 틈새, 서이령의 시가 파고들고자 하는 부분은 바로 이 부분이다. 그의 시는 어렵지 않은 일상어를 중심으로 구조화되어 있으되, 간혹 독특한 시적 정서를 전달하거나 혹은 일상적인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통용되는 시어가 존재하곤 한다. 때문에 우리는 이 시를 읽으며 그가 제시하는 언어들로부터 객관적인 현실과의 여집합적 의미를 감각하게 되고, 그 여집합을 통해 주체가 놓인 현실의 아스라한 통증 또한 동시에 감각하게 된다.
- 임지훈(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