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설 엿보기
세상은 그렇다, 혹은 원래 그런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되새기는 이 명제는 단순 긍정의 언표로 보인다. 하지만 화자의 이중적 태도가 감지된다. 세상을 나의 바람대로 만들 수 없다, 나의 힘으로 바꿀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너무 확실해 보이는 이 사실을 호락호락 수긍하지만은 않겠다는 것이다. 이때 발화에 배어나는 자조적 뉘앙스야말로 자기의 무력감을 표지하면서 동시에 자신이 아직 세상에 함몰하지 않았다는 비의(秘義)를 함축한다. 세계와의 불화는 자신의 존재 근거가 된다. 지난 세기의 사상가 안토니오 그람시는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이 우리의 바람과 일치하게 만들고,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를 피하기 위해 서로 힘을 모으고 함께 노력하는 것뿐”이라고 역설했다. 그렇다, 그람시의 주장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쩌면 유일한 해법을 제시한 것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투지와 연대가 발휘하는 힘에 대한 이 낙관적 신뢰는 지난 세기가 역사의 시대이기에 가능했던 꿈이었을 것이다. 그나마도 그람시 자신이 세상 일반과 다르게 생각했다는 이유로 갇힌 감옥에서 사유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마주하고 있었기에 더 큰 울림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언어와 마찬가지로 기원이나 계보와 관련하여 묻는다면, 누구도 자유의지의 최종 심급인 절대정신의 부재로 인한 역사의 종언을 부정하기 어렵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의 고착, 대중매체의 확산과 정교화에 따른 대중문화의 일상화. 오늘 우리 시대에는 파편화된 개인이 검은 유령처럼 몰려다니지 않는다. 모든 존재는 언제, 어디서든 대체 가능한 모듈(module)이 되어 접속되거나 차단될 뿐이다. 파편은 떨어지거나 깨진 전체를 상상할 수 있다. 이 상상의 힘을 통해 본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계기(motive)를 형성한다. 하지만 모듈은 자기 복제가 곧 전체의 형성이기 때문에 기원이나 계보를 갖지 않는다.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수시로 밀려오는 물결에 따라 떠오르거나 가라앉는 운동의 반복이 역사를 대체한다. 이렇게 존재는 다 익명성의 바다에서 익사한다.
강수경 시인이 드러내는 세계와 불화하는 자아의 실존적 고뇌는 ‘자기만의 방 한 칸’이라는 개인적 희망과 “아픈 손가락들을 위해/집을 짓는”(「시인의 말」) 당위의 사이, 틈, 뜻대로 좁혀지지 않는 간극(間隙)에 위태롭게 걸쳐 있다.
오늘은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어떤 날은 화창했으나 오후엔 흐렸고 저녁엔 잠시 붉은 노을이더니 밤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엔 잦아진 빗물이 우수관에서 작은 곤충들의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고 아침엔 안개로 피어올랐다 모든 것들이 어디론가 숨어버린 밤 사람들은 익명성을 바랐고 숨은 것들을 찾느라 기억의 해마를 뒤졌다 잠을 이루지 못한 은행잎들은 보도블록에 노랗게 실신했다 로또는 맞지 않았고 사람들은 한 끼 밥보다 희망에 돈을 걸었다 기다리던 소식은 번번이 부러지고 부러진 소식 모아 불쏘시개로나 써 볼까 불화하는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 전문
표제작인 이 시는 ‘자연/인위’의 대립을 통해 인과적 접속사인 ‘그래도’의 의미를 되묻는다. 그 물음의 끝에는 현존재의 유일한 거소(居巢)인 ‘오늘’에 대한 회의가 자리한다. “어떤 날은 화창했으나 오후엔 흐렸고 저녁엔 잠시 붉은 노을이더니 밤에는 비가 내렸다 새벽엔 잦아진 빗물이 우수관에서 작은 곤충들의 날개 비비는 소리를 내고 아침엔 안개로 피어올랐다”라는 진술은 가치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 관찰의 결과다. 무작위로 형태가 변한 것 같지만, 흐리고 붉다가 비가 내리고 안개로 피어오르는 현상은 우리 눈이 포착하지 못하는 원인과 결과, 혹은 작용과 반작용의 결과일 뿐이다. 반면에 작품의 후반부, ‘익명성’을 바라며 ‘기억의 해마’를 뒤지는 사람들의 행위는 “로또는 맞지 않았고 사람들은 한 끼 밥보다 희망에 돈을 걸었다 기다리던 소식은 번번이 부러지”는 것처럼 이유 없이 좌절한다. 누군가는 ‘운’ 혹은 ‘통계적 확률’을 말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행위는 인과론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 근대 이후 계몽의 기획이었다. 게으른 자는 가난하고, 자본의 논리에 충실한 자만이 그 결실을 따먹을 수 있다. 새삼 거론하기도 버겁지만, 이 논리는 선행 조건이라는 변수가 압도적으로 작용하는 상관관계를 인과로 오역(誤譯)할 때 흔히 발생하는 인식적 기만이다. 어제는 그저 지나갔기에 오늘에는 오늘 몫의 희망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무작정 품게 한다. 시인은 이 사실에 회의를 드러낸다. “불화하는 오늘은 벌써 어제가 되었고, 그래서 오늘은 웃었다”라는 선언에서 ‘그래서’는 인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불화하는 오늘’이 ‘어제’란 이름으로 ‘오늘’을 잠식한다는 것을 이면의 논리로 드러낸다. 따라서 이때의 ‘웃음’은 세계를 향한 화자의 이중적 태도를 온전하게 포함한다.
- 백인덕(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