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의 소용돌이 속에서 되새기는 역사의 가르침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번 시집에도 시인과 정치인이라는 두가지 정체성과, 거기서 비롯되는 경험이 오롯이 담겨 있다. “시 쓰다 말고 정치는 왜 했노?”라는 물음에 시인은 “세상을 바꾸고 싶었”(「심고(心告)」)다고 순정한 마음을 고백한다. 또한 역사를 통찰하는 격조 높은 비유로 우리가 곱씹어볼 고민거리들을 던진다.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정계 진출을 돌이켜보자. 큰 뜻을 품은 성리학자들이 선조 치하에서 정권을 잡았지만 이내 붕당 간의 소모적인 반목이 심화되고, 외세의 침략까지 맞이한 조선은 심대한 위기에 처한다. 급기야 처절한 징비(懲毖)의 기록을 후세에 남겨야 했던 사림의 실패를 시인은 작금의 현실에 대입한다. “꿈꾸던 세상이 오리라던 믿음”은 무너지고 “수백년 적폐를 단 몇해에 바로잡는 게/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째서 “나라가 그 지경이 되었는지”(「사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묻는다.
이때 “오해의 화살”에 맞고 “비난의 칼날에 베여 비통해”(「새해」)할지언정 “적개심으로 무장한 유령들”(「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을 탓하지 않는 시적 화자의 모습은 눈길을 끈다. 그는 깊이 절망하면서도 “성정이 남루해지는 건 오히려 제가 아닌가”(「속유(俗儒)」) 자문하며 반성한다.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며 “내 안의 어두운 나를 차분히 응시”(「정오에서 가장 먼 시간」)하는 장면에는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신령한 기운마저 서려 있다. 이 가없는 참회의 어둠 속에서 길 잃은 ‘나’를 이끌어주는 것은 이치를 탐구하고 백성의 안위를 염려하며 ‘기본’에 충실했던 옛 성현의 가르침이다. ‘나’는 다산 정약용, 퇴계 이황 등 위대한 스승들을 떠올리며 격물치지(格物致知), 이용후생(利用厚生), 경세치용(經世致用)과 같은 유학의 정신을 읊조리고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잡는다. 번뇌와 좌절을 딛고 역사의 교훈과 초심을 치열하게 좇음으로써 간곡하고 간절하게, 정오의 도래를 주문하는 것이다.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고 어지러운 마음을 추스르는 시
이번 시집 곳곳에 담긴 아름다운 자연물은 감상의 대상보다 반성의 매개체이자 삶의 지향에 가깝다. 시인은 온갖 모욕과 증오가 난무하는 도시에서 부대끼느라 피폐해진 심신을 자연에 의탁하여 “죽음과 영원한 삶의 이치 밝게 꿰뚫어보는/깊은 지혜”(「이단」)를 얻는다. 예컨대 “나무 가득 꽃 피워놓고/교만하지 않는 백매화”(「꽃나무」)를 보며 절제와 겸허의 미덕을 배우고, “자신에게 오는 모든 순간순간을/받아들일 줄”(「가을 나무」) 아는 나무의 미덕에서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삶의 경건함을 깨닫는다. 시적 화자가 자연으로부터 느끼는 감정은 숭고함에 가깝다. 그에 비한다면 인간의 마음은 한없이 초라하지만, 그 초라함마저 숨기지 않고 털어놓음으로써 시인은 독자들에게 공감의 자리를 내어놓는다. “혼탁한 물”과 “퀴퀴한 냄새에 휩싸인” 가로수를 바라보며 자신 또한 “도시로 불려 나와 산 지 오래되었”(「도시 장미」)다고 말하는 담담한 문장이 씁쓸하게 읽히는 까닭이다. 그러나 흙먼지 덮어쓴 가로수라 한들 나무가 아닐 수는 없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세속의 때가 자욱한 곳에 거한들 가슴에 자연을 품은 이상 시인은 시인이 아닐 수가 없다. 그렇기에 이 무겁고 “사나운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사의재(四宜齋)」) 다짐한다. 거센 태풍과 노도에 맞서는 이 인생이라는 항해가 “치열하고 절박한 생의 시간으로 축적”(「출항」)되리라 믿고 몇번이고 다시 출항을 결심한다. 역경 앞에서 삶의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하는 묵묵한 자세에서 우리는 도종환 시의 심원한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불의의 시대를 함께 건너는 따스한 동행
전쟁 같은 삶을 살면서도 시인은 “세속의 길과/구도의 길이 크게 다르지 않다”(「풀잎의 기도」)는 믿음을 간직하며 온유함을 잃지 않는다. ‘부드러운 직선’처럼 섬세한 감성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동시에 가꾼다. “제비꽃 애기똥풀 같은 꽃만 보아도 마음이 순해지고”,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많고/세상에는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걸” 명심하며, 늘 몸을 숙여 세상의 낮은 곳에 온기를 나눈다. 고달프고 외로운 이들에게 “하루를 잘 살아내는 일이/가장 큰 복수”(「숲을 떠나온 지 오래되었다」)라고 진정어린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이번 시집을 통해 시인이 그늘진 인생의 골목길에 밝힌 “사랑과 연민의 초”(「대림(待臨)」) 옆에 나란히 서보자. 사계절이 무상하듯 자정의 암흑도 언젠가 걷히기 마련이다. 가녀린 촛불 하나도 언젠가 “칠흑 같은 세상”(「전야」)을 밝힐 무수한 촛불이 되고 끝끝내 정오의 햇살로 세상을 비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