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단편소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달로 간 코미디언」
「깊은 밤, 기린의 말」 「난주의 바다 앞에서」
첫 소설집 『스무 살』(2000)부터 최근 소설집 『이토록 평범한 미래』(2022)까지 여섯 권의 소설집에 묶인 55편의 중단편 가운데 김연수 작가가 직접 꼽은 4편의 중단편을 담았다. “지금까지 펴낸 여섯 권의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 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라는 작가의 설명처럼 4편의 소설은 김연수의 작품세계에서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은 문학평론가와 문학 전문 기자, 서점 MD 등을 대상으로 ‘21세기 최고의 중단편소설’을 묻는 설문에서 1위를 차지한 작품으로, 연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설산에 오른 한 남자를 통해 ‘사랑의 모든 국면’을 경험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한 소설이 좋은 소설이기 위해 갖춰야 할 실존의 모험, 의미의 모험, 글쓰기의 모험이라는 3차원적 모험 구성의 방식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드러내 보인다”는 평과 함께 제7회 황순원문학상을 수상한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공들여 묘사하는 것 또한 빈틈으로 남은 누군가의 삶이다. 한때 인기를 끄는 코미디언이었던 아버지가 가족에게 가장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사라진 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의 삶을 재구성하게 된 딸의 목소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헤어진 남자친구의 입을 통해 전해진다.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말해주는 건 이야기가 아니라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그런 미세한 결 같은 것”(104쪽)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누군가의 삶은 그 사람의 직접적인 진술이 아니라 목소리가 끊어지고 멈추는 자리에서, 새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의 침묵 속에서 드러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깊은 밤, 기린의 말」에서 침묵은 인물이 가진 절대적인 조건이기도 하다. 소란스러움이 물러난 어두운 거리를 비추며 시작하는 이 작품은 ‘내성적인 쌍둥이 자매와 말 못하는 자폐아’를 통해 캄캄하고 깊은 좌절 위에 어떻게 ‘돌멩이처럼 단단한 희망’이 생겨날 수 있는지를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난주의 바다 앞에서」는 30년 만에 재회한 두 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면서, 그보다 더 오래전에 살았던 옛 사람의 이야기를 불러오면서, 인생으로부터 KO를 당해 주저앉게 되었을 때 그 넘어짐 다음에 뜻밖에 우리를 향해 불어오는 ‘두번째 바람’에 대해 절실하고 설득력 있는 어조로 말해준다.
나는 당신들이 부러워. 당신들은 사랑의 모든 국면을 다 경험했어. 심지어 죽음까지.
_「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48쪽
나는 어느 날 사막에서 실종된 한 남자의 고독을, 그 남자를 이해하기 위해 사막을 향해 달려가는 한 여자의 욕망을, 그리고 그 남자와 그 여자가 보게 될 사막의 빛과 어둠, 열기와 서늘함, 고독과 슬픔을 들었다.
_「달로 간 코미디언」, 134쪽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우리 머리 위에는 거대한 귀 같은 게 있을 거야. 그래서 아무리 하찮고 사소한 말이라도 우리가 하는 말들을 그 귀는 다 들어줄 거야. 그렇다고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맺어주거나 내 안에 가득한 슬픔을 없애준다는 뜻은 아니니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그저 크고 크기만 한 귀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귀가 있어 깊은 밤 우리가 저마다 혼자서 중얼거리는 말들은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은 거야.
_「깊은 밤, 기린의 말」, 154~155쪽
버티고 버티다가 넘어지긴 다 마찬가지야. 근데 넘어진다고 끝이 아니야. 그다음이 있어. 너도 KO를 당해 링 바닥에 누워 있어보면 알게 될 거야. 그렇게 넘어져 있으면 조금 전이랑 공기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느껴져. 세상이 뒤로 쑥 물러나면서 나를 응원하던 사람들의 실망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지. 바로 그때 바람이 불어와. 나한테로.
_「난주의 바다 앞에서」, 194~195쪽
◎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
장편소설 『일곱 해의 마지막』(2020)은 청춘, 사랑, 역사, 개인이라는 그간의 김연수 소설의 핵심 키워드를 모두 아우르는 작품으로, 한국전쟁 이후 급격히 변한 세상 앞에 선 시인 ‘기행’의 삶을 그려낸다. 1930~40년대에 시인으로 이름을 알리다가 전쟁 후 북에서 당의 이념에 맞는 시를 쓰라는 요구를 받으며 러시아문학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는 모습에서 기행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 ‘백석’을 모델로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기행은 원하는 대로 시를 쓸 수 없는 상황, “희망과 꿈 없이 살아가는 법”(260쪽)을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어떻게든 시를 붙들려 하지만 번번이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시를 향한 마음이 아무리 간절하더라도, 개인을 내리누르는 현실의 무게가 압도적이라면 그 마음은 끝내 좌절되고야 마는 걸까. 속수무책의 현실 앞에서 작가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저히 버려지지 않는 마음, 끝내 이루지 못한 꿈은 어떻게 되는 걸까. 『일곱 해의 마지막』은 이러한 물음을 안고 한 명의 시민이자 작가로서 어두운 한 시절을 통과한 끝에 김연수가 내놓은 긴 대답과도 같은 소설이다.
그래도 꿈이 있어 우리의 혹독한 인생은 간신히 버틸 만하지. 이따금 자작나무 사이를 거닐며 내 소박한 꿈들을 생각해. 입김을 불면 하늘로 날아갈 것처럼 작고 가볍고 하얀 꿈들이지.
_『일곱 해의 마지막』, 422쪽
◎ 시 「강화에 대하여」 외 6편
김연수 작가가 시인으로 먼저 등단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데뷔작 「강화에 대하여」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그의 시를 접하기 어려웠던 독자들에게 이 6편의 시는 특별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번에 처음으로 공개하는 6편의 시는 1993년부터 1995년까지 쓰인 작품들로, 한 번도 본 적 없던 이십대 시인으로서의 김연수를 만날 수 있게 해준다.
◎ 산문 「숲과 더불어, 거기 오래 머물길」 외 6편
팬데믹 기간 동안 김연수 작가가 어느 때보다 자주 향한 곳은 도서관이다. 경주에 위치한 시립도서관부터 청주에 있는 열린도서관까지, 작가의 천천한 걸음을 따라 산책하듯 걸어가면 전국 곳곳에 자리한 다양한 도서관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고요함 속에서 열성적으로 책을 읽는 사람들과 서가에서 우연히 발견한 책을 통해 사유를 넓혀가는 작가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도서관이 필요한 까닭을, 왜 책을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자연스레 깨닫게 한다.
나무들 사이에 서서 그들과 함께 어두워지며 올려다보는 저녁의 빛은 세상에 지친 마음을 교정해준다. 모든 것이 다 끝난 뒤에도 우리에게 남은 게 있음을 지켜보는 일. 이것이 저녁 산책의 기쁨이다. 애당초 기쁘게 살고 싶다, 는 아니었다. 아무리 번거롭고 힘들더라도, 또 누구도 알아주지 않고 심지어 오해를 한다 해도 기쁘게 죽을 수 있도록 살고 싶다, 는 마음이 거기 있었다.
_「언젠가 나도 꿈꾼 적이 있는, 해피엔딩」, 478쪽
※ 『디 에센셜 김연수』는 출간 후 1년간 교보문고에서 단독 판매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