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그를 이단아라 불렀다
2005년 《시인세계》로 등단한 한우진 시인의 세 번째 시집 『대지극장에서 나는, 검은 책을 읽었다』가 시인동네 시인선 230으로 출간되었다. 한우진은 오롯이 시로서만 인정받고 오롯이 시로서만 존재감을 드러내는 시인이다. 시만큼은 시인에게 인정받는 시인. 하지만 그런 시인들의 설 자리가 점점 사라져가는 작금의 문학판에서 한우진 시인과 같은 존재는 이단아에 불과할 따름이다. 이단아의 문학이 제대로 평가받는 시대가 분명 우리에게는 있었고, 앞으로도 그런 시대가 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한우진 시집을 세상에 내보낸다. 문학평론가 임지훈은 “한우진의 이번 시집이 그 물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유의 부피와 깊이, 물성을 그 안에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마치 곱씹을수록 그 의미가 달라지고 깊어지는 역사적 사건처럼, 한우진의 시는 지금 우리 앞에 현현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평했다. 하지만 더 많은 것이 이 시집 안에 담겨 있고, 숨겨져 있다. 시인은 입을 닫고 시로 말해야 한다.
■ 해설 엿보기
한우진의 시는 많은 것을 담고 있다. 주제론적인 측면에서 그의 시는 인간의 실존에서부터 세계에 대한 고민, 유년 시절에 대한 회상, 현대 사회에 대한 실의, 자연의 섭리에 대한 고찰, 시간의 흐름에 대한 생각 비가역성에 대한 단상들, 아버지의 실향과 그것을 사후적으로 느끼는 ‘나’의 문제 등,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하지만 한우진의 시가 많은 것을 담고 있다는 것은 단지 주제론에만 머무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의 시가 담고 있는 이야기의 총량은 활자의 총량을 아득히 초월한다. 그의 시적 언어가 일상 언어의 수준을 벗어나기 위해 매 순간 몸을 비틀고 있으며, 이러한 비틀림으로부터 일상 언어에서의 의미를 초과하는 여백이 거듭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한우진의 시는 표면적으로 확고하고 또렷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도, 매 순간 그의 시가 노리는 것은 이 비틀림의 생성, 의미를 초과하는 여백의 발생인 것처럼 보인다. 자칫 이야기가 지닌 서정에 매몰되어 끌려다닐 수 있는 순간에도 그의 언어는 상투적인 의미의 덫에서 빠져나오고자 매 순간 몸부림을 친다.
불을 만들어 옮기던 때가 있었다.
접시에 담긴 음식처럼 집집마다 돌렸다, 계절을 깨우며
나무들이 그것을 옮겼다. 불여화쟁(不與火爭)
느릅, 버드, 느티, 박달, 뽕, 산뽕, 대추, 은행, 조롱, 졸참
짝을 이뤄 동시상영은 강과 골짜기로 번졌다.
죽은 자들의 책이 살아났다. 검은 불꽃,
죽은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는 눈[雪]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먼발치에서 사랑하다가 같이 죽는 ‘내 나무’
태어남과 죽음의 동시상영관
대지극장에서 나는, 검은 책을 읽었다.
불꽃에 밑줄을 치면서,
너를 사랑하다 죽은 ‘내 나무’는 대지극장에 있었다.
― 「대지극장」 전문
위의 시에서 화자는 선사 시대 태고의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불을 나누던 원시 공동체의 이야기 속에서, 생과 사는 불을 매개로 순환하며, 자연은 이러한 순환의 무대이자 순환이 가능케 하는 배경으로 존재한다. 배경이면서 동시에 그러한 순환을 주관한다는 점에서, 자연은 이 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러한 자연의 동시적 특성을 화자는 “대지극장”이라는 명칭으로 표식하며, 그것이 생과 사의 순환이 상연되는 공간이라 호명하면서도 이러한 공간 자체가 이 시의 중핵임을 제목으로 삼아 밝히고 있다. 무대이자 중핵인 “대지극장” 위에서, 모든 시적 대상은 인간과 자연물의 경계를 떠나 모두 동등한 위치로 존재한다.
「대지극장」이라는 제목을 통해 펼쳐지는 시적 대상들의 연쇄, 특히 “불”이 이어주는 무수한 자연물들과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인공적 사물들은 일상 언어의 굴레로부터 벗어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 무수한 태고적 심상이 단지 순환과 섭리라는 대자연의 진리를 찬양하기 위해 제공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시금 이 모든 것이 「대지극장」이라는 알레고리로 그 의미가 매듭지어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극장은 일련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관람자를 향해 상연된다. 예컨대,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라는 관찰자가 없다면 그것은 알레고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중요해지는 것은 「대지극장」에서, 그것이 「대지극장」임을 감각하면서 존재하는 ‘나’라는 존재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또 한 가지 주목되어야 하는 것이 있다. 모든 의미를 성립 가능하게 만든다는 이유에서 ‘나’라는 존재는 자칫 절대적으로 보이지만, 실상 그는 「대지극장」에 앉아 보는 것 외에는 어떠한 별도의 행동을 취하지는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 또한 무력감이나 무능함과는 구별되어야 하는데, 바라보는 존재로서의 ‘나’라는 특수한 시적 주체를 정립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때의 ‘바라봄’은 “검은 책”을 읽는 모습과 “너를 사랑하다 죽은 ‘내 나무’는 대지극장에 있었다.”는 과거형의 표현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게 된다. 그것은 ‘나’의 ‘바라봄’이 단순한 관조나 관망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의미화되지 못한 과거를 자기 안에 다시 새기기 위한 행위라는 사실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 시인의 산문
나의 시는 매서운 바람으로부터 증여받은 눈보라를 뚫고 왔다. ‘쓰라림’이 배어 있는 흰 천이 가없이 휘날리는 어스름, 놀이 번지듯 집집마다 저녁이 켜지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음악으로 들으면서 그냥 바라볼 뿐이지만, 열 그루의 나무를 휘감고 올라가며 타는 불빛은 가슴 터지도록 벅차다. 그러니 이쯤에서 나의 벗이여 한 번쯤 생각해 보라. 개양귀비꽃의 목적이 ‘꽃밭’이 아니듯이, 시의 목표는 ‘시집’이 아니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