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뒤로 달이 밝아 그림자가 늘 내 앞으로 걸어갔다
[손금을 본다]는 김승욱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구두와 독방」 「월정사(月井寺)에서 우물 찾기」 「옥천동(玉川洞)」 69편이 실려 있다.
김승욱 시인은 1969년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춘천에서 성장했다. 1989년 아주대학교 영문과에 입학, 문학동아리 ‘소금꽃’에서 활동했다. 1996년부터 동양화재(현 메리츠화재) 및 동부화재(현 DB손해보험)에서 근무했다.
시인은 대학을 졸업한 후 28년여의 기간을 보험회사 기업영업부에서 근무하면서 임원(상무)으로 승진까지 할 정도로 회사-인간으로 긴 세월을 살아왔다. 하지만 같은 해 말 식도암 진단을 받고, 수술까지 하고 회복 후 복직했지만 몇 달 뒤 폐 전이로 회사를 나왔다. 사회적 삶의 절정기에서 환자의 삶으로, 롤러코스터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데 걸린 시간은 채 6개월이 되지 않았다. 시인이나 가족들이 얼마나 황망했을지…… 감히 추측하기 어렵다. 시인은 매일 새벽 6시에 일어나 7시쯤 지하철을 타고 강서구에서 여의도나 강남까지 출근하는 생활을 계속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작가를 꿈꾸며 문학동아리에서 글을 쓰며 방황하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루틴이다. 시인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그토록 성실하게 밥벌이를 해 왔다는 사실에 놀랐다. 어른이 되고, 아내와 아이들을 거느린 가장이 그의 성실한 밥벌이를 가능케 했을 것이다. 시인이 갓 직장인이 되었을 때 가끔 영업맨이라는 사회적 옷을 걸친 그가 직장이라는 전장에서 잘 버틸 수 있을까 싶어서 전공을 살려 출판 일을 해 보면 어떻겠냐고 권한 적도 있다. 하지만 그건 좁은 소견이었다. 시인은 묵묵히, 찬찬히, 공황장애가 올 만큼 실적 압박에 시달리면서도 이 일을 즐기며 해 왔다.
퇴직 후 시인은 또 다른 루틴을 만들고 있다. 매일 걷기 운동을 하고, 동네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시를 쓰고 있다고 한다. 지금까지 가족들과 긴 휴가도 제대로 못 갈 정도로 숨 가쁘게 살아왔던 시인은 갑작스레 다가온 ‘행복을 잡아먹은 불행’에 대해 곱씹으면서, 자신의 몸 안에 복병처럼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이 암이라는 녀석을 들여다본다. 때로 시인의 시선은 자신이 사회-인간으로 지냈던 공간으로 향하고, 또 때로는 학창 시절을 보냈던 과거의 시간으로 향한다. 이 시집은 1부는 암에 걸리고 나서의 소회, 2부는 직장 생활과 가족에 대한 단상, 3부는 청소년기를 보냈던 춘천에 대한 기억으로 구성되어 있다.
옥천동 11-55번지. 녹색 철대문의 개량식 한옥집의 추억을 시인과 나는 공유하고 있다. 춘천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 졸업 후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이룬 평범한 가장. 중년을 맞이한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암과 마주한 사람. 그는 투병을 하며, 자신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몸에 침입한 병에 대해 곱씹고 곱씹는다. 그러면서도 절망과 불행에 지금의 삶을 저당 잡히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지금까지 자본주의 최전선에서 월급쟁이로 가속의 페달을 밟으며 살아왔던 생활에서 모처럼 멈춤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서 가족을, 공간을, 과거의 시간을 문서화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사랑하는 나의 동생이다. (이상 김양선 문학평론가의 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