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고 진솔한 세계 체험
이 시조집은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거쳐가는 것으로서의 기행보다는 잠정적인 체류의 생활을 담고 있는 존재시학이다. 제1부의 텍사스, 제2부의 비스바덴, 제3부의 더블린, 제4부의 하와이, 그리고 마지막 제5부의 아일랜드. 특히 아일랜드, 더블린은 시인의 개인적 상황과 맞물려 더 오래 머물러 있었고 더 자주 찾았던 곳으로 나타난다.
여행은 사람에게 과연 무엇을 주는가. 우선 세상이 내가 살아왔던 곳보다 확실히 넓다고 생각하게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되면 나라는 존재가 한없이 작아 보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바람 속의 한갓 먼지일 뿐이다. 여행은 이렇게 우리를 아주 작게 만들어 운명과 우연에 떠밀려 어떻게도 될 수 있는 하찮은 존재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이렇게 먼지처럼 작고 가벼워짐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속한 작은 세계들의 중력장에서 쉽게 떠올려져 이리저리 휩쓸려 다닐 수 있고, 멀리 날아가 더 넓은 세계를 맛볼 수 있게 된다.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에는 무거운 세류 속을 뚫고 헤쳐나가는 길 말고 가볍게 날아올라 벗어날 수 있는 길도 있음을 배운다.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구조화된 장과 싸우며 바꿔 가는 게 아니라 가볍게 날아올라 다른 곳에 ‘나’ 자신을 가져다 놓는 길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시조집에는 일본 소설가 엔도 슈샤쿠의 『침묵』(1966)을 노래한 작품이 있다. 박해와 순교 속에서 침묵하고 있는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내가 눈을 감아주마, 널 안아 품어주마.’
높고 둥근 목소리가 두려움을 거둬가자
한 발을
들어올렸다
그렇게 밟히셨다
십자가 지신 얼굴 다 닳도록 지나갈 때
새벽은 오신다고 목청껏 닭을 울려도
헤아려
못 듣는 귀여
더 간사한 발바닥이여
─ 「Step me - 침묵」 전문
엔도 슈샤쿠의 『침묵』은 이 나가사키의 박해, 순교를 배경으로 하나님의 침묵의 의미를 고통스럽게 간구했던 포르투갈 로드리고 신부의 고뇌를 그린다. 이승은 시인은 비스바덴에서 이 『침묵』을 소설 또는 영화로 보았을 것이다. 우리는 한갓 보잘 것 없는 여행자가 되어 바람 속에서 먼지가 되어 신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만 신은 자신의 존재를 쉽게 드러내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이 저 블레즈 파스칼이 『팡세』에서 반복적으로 이야기한 ‘숨은 신’의 의미다. 시인은 한 존재가 가슴에 끌어안기에는 ‘한없이’ 넓은 세계를 떠돌며 생각을 거듭했을 것이다. 무엇이냐. 살아간다는 것은, 먼지의 삶은 무엇이냐.
“필사적”인 “목숨”들에의 천착
오스틴 외곽 도로 앞차에 치인 노루
한 방울 슬픔 없이 보험료가 계산되자
저만큼 서녘 하늘의 눈자위가 붉어진다
─ 「목숨 값」 전문
제일 먼저 일어나서 앞마당을 깨우는 풀
심심해서 그런가
새 우는 소릴 낸다
흠 하나 없는 얼굴로 밤새 훌쩍 자랐네
전원을 켜는 순간 소스라쳐 눕는 풀
칼바람 맞서가며
파르륵 뒤채다가
결국은 목숨을 놓는 초록가슴 서너 평
─ 「잔디를 깎다」 전문
이 두 작품은 모두 생명이 자기를 내어 놓은 상황을 노래한다. 미국의 “오스틴 외곽 도로”와 독일 비스바덴의 가정 집, 서로 다른 곳이다. 이 멀리 떨어진 곳, 시간적으로도 거리가 큰 곳이지만 시인은 “목숨”의 의미에 천착한다. 도로를 건너려다 자동차에 의해 치인 노루, 푸르게 더 자라고 싶은데 사람들이 잔디라고 깎아내서 목숨을 잃는 것이 아닌가. 동물이든 식물이든 소중하고 치열한 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필사적」이라 작품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검은 개의 역주행”이라는, 시조에서는 다소 낯선 강한 소재를 이끌어 들인다. 주인이 버린 것일까, 죽음이 닥치는 줄도 모르고 주 인을 찾아 달리는 개와 “승강장”에서 “선로로 뛰어내”린 “의자 위 먹구름”은 어떤 은유임에 틀림없다. 누군가 선로에 뛰어들었다는 것이다. 개는 살기위해 뛴 것이고 한 사람은 죽기 위해 뛰어내린 것이다, 필사적으로! 시인 또한 “뜨겁게 무거워지다 거칠게 식어”가는 ‘생명’의 위기, 혹은 위독을 필사적으로 따라잡는다.
이 목숨에 대한 시인의 천착이 「순례자, 샴바」에서 다시 한번 빛을 발한다. 자기 식솔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레트바 호수에서 발바닥이 불어터지면서도 소금을 채취하는 아프리카 노동자의 모습을 그려냈다. 레트바는 아프리카 동서부 세네갈에 있다는 핑크빛 호수다. ‘제 몸을 파내듯이 삽질을’ 해도 목숨이나 연명할 뿐 벗어나지 못하는 생의 비애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이처럼 『분홍입술흰뿔소라』가 넓은 세계를 주유한 시인의 삶의 여정을 끌어안고 있으면서도 거기서 단순히 가벼운 초월의 노래들만을 옮겨놓지 않고 이렇게 “필사적”인 “목숨”들에 천착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살아간다는 행위, 살아 있다는 상태의 의미, 가치의 중차대함이 이 시조집 저류에 흐른다는 것이다.
소외 없는 “목숨 값”의 의미
여행은 경유든 체류든 낯선 것,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다. 문제는 어떤 것을 만나느냐, 마음 속에서 무엇을 만나기로 예약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리라. 『분홍입술흰뿔소라』는 이 뜨겁게 존재하는 “목숨”들을 만나고 온 체험의 산물일 수도 있다.
「크로이처」는 제2부 ‘비스바덴 시편’들을 수록한 곳에 있고 「부겐베리아」는 제4부 ‘하와이 하와유?’에 수록되어 있다. 하나는 베토벤의 바이올린 소나타 제9번 일명 ‘크로이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와이에서 만난 꽃 부겐베리아를 노래한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늘상 생각하듯 강렬한 의지와 열정의 작곡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후~불면 / 찢길 듯 얇은” 꽃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두 존재에서 같은 것, 자기를 자기로서 지켜내게 하는 어떤 것을 본다. “왕실”에도, “귀족”에도 “종속”될 것을 거부하고, 가혹한 “운명”쯤이야 “귀 안”에 가두어버린 베토벤, 「크로이처」는 그와 같은 “폭풍” 같은 삶의 표현이다. 하와이에서 만난 얇디나 얇은 꽃잎의 ‘부겐베리아’도 “지킬 것 / 지켜내느라/ 외로 틀며 피는” 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세상의 존재는 어느 것 하나 치열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이 이 시인의 시조정신이다.
화장기도 부질없이 이제 한풀 꺾인 여자
가을 한 입 베어 물며 카페 밖을 내다본다
나 또한 이만치에서 저만치가 한참 달다
─ 「머랭케잌」 전문
이제 시인은 먼 곳에서라도 자기 자신을 만날 차례가 된다. 「머랭케잌」은 제3부 ‘더불어 더블린’ 쪽에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 시인은 한 카페에서 “화장기도 부질없이 이제 한풀 꺾인 여자”를 우연히 목격한다. 그녀는 “가을 한 입 베어 물며 카페 밖을 내다”보고 있다. 머랭케잌은 꽤나 달디단 디저트일 것이다. 삶의 “가을”에 접어든 여자가 “베어” 문 머랭케잌은 역설적으로 달다. “나 또한 이만치에서 저만치가 한참 달다”는 표현은 중년을 넘어섰지만 아직도 여자로서의 꿈을 놓치고 싶지 않은 뜨거움일 수도 있다. 어쩌면 머랭케잌의 단맛은 차라리 “가을”에 접어든 “한풀 꺾인 여자”의 신산스러움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 아닐까. 이 속에도 매운 ‘목숨값’이 스며들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찾아낸다. 이 점에서 시인은 더블린 어느 카페에서 우연히 목격한 여자에게서 자신의 삶을 비춰냈다고 볼 수 있다.
딸이면서 며느리로
아내이자 어머니로
시인입네, 수십 년을
엉거주춤 살아왔다
어쩌다 나는 없어도
어디에나 있었다
─ 「피규어」 전문
이 「피규어」는 제1부 ‘텍사스 일기’에 실려 있다. 나는 어디에나 있다. 서울에도 있고 텍사스에도 있다. 관계를 형성하며 시인의 심중 깊은 곳에 들어앉아 있는 피규어는 ‘자의식’의 새로운 발견이라 할 수 있다. “없”는데도 “어디에나 있”는 나처럼 ‘나’는 있어 왔으되 없었던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피규어에 빗대고 있다. 자기를 얽어맨 구조화된 장에서 부여된 ‘역할’로서의 자기가 아닌, 진짜 자기를 찾는 문제 역시 진정한 “목숨값”을 찾아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시인이 먼 여행들에서 얻어온 값진 경험들의 이름을 “목숨”이며 “목숨값”이며, “필사적”인 매달림 같은 것에서 찾아온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시인이 겪는 존재의 위기, 그 내적 위기감이 가장 극명하게 표현된 시 작품이 있다.
바다 속 2킬로미터 심해상어 산다는데
어둠에 길이 들어 아예 눈을 버렸다는데
수억 년 먼눈의 안쪽, 그 빛깔 나 꿈꾸는데
─ 「간」 전문
왜 이 시의 제목이 ‘간’이 되어야 하느냐? “바다 속 2킬로미터” 짙은 심해를 살아가는 물고기, “어둠에 길이 들어 아예 눈을 버렸다는” “심해상어”의 이야기는 이 시조 종장에 와 갑작스럽게 ‘나’의 이야기로 전환된다.
“수억 년 먼눈의 안쪽”에 무엇이 있을 것인가? 오로지 상상과 의지에 의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빛깔”에의 꿈을, 시인, 곧 화자는 생각한다. 어둠이 깊을 대로 깊은 곳에서 꾸는 “빛깔”의 꿈은 응당 이 작품의 초장, 중장과는 다른, 반전의 세계가 아니겠는가?
이 작품이 제목이 ‘간’인 것은 시인 윤동주의 시 「간」에 통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필시 이를 의식했을 것이다. 윤동주는 자신의 간에서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고 했다. “코카서스 산중에서 도망쳐 온 토끼처럼” “간을 지키자”고도 했다. 그런 그 자신은 ”끝없이 침전하는 프로메테우스“, 다시는 ”용궁의 유혹“에 떨어지지 않을, 최후의 구원을 지키려는 존재다.
이 최후의 절박감에서 윤동주의 「간」과 이승은 시인의 「간」은 닮았다. 시적 화자가 느끼는 어둠의 깊이, 심해의 깊이에서 닮았다. 두 「간」은 지켜야 할 것을 향한 절박감을 공유한다. ‘목숨값”을 찾는 절실함에서 같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는 눈이 멀어 볼 수 없는 심해상어의 간이 우리 사람 눈에 좋다고 한다. 시인은 이 작품 종장의 행간에 슬그머니 숨겨놓고 독자로 하여금 찾아낼 여지를 주었다.
두고 온 고향처럼 착할 거 같은 이름
귀를 대면 바다 얘기 들려줄 거 같은 이름
부르면 수평선 너머로 누가 올 것 같은 이름
창백한 진열장에 어쩌다 갇혔지만
립스틱 바른 적 없는 첫 입술 살짝 열며
봉쥬르, 환한 저 인사 앙스바타 해변의 여자
─ 「분홍입술흰뿔소라」 전문
이 시에 나오는 “앙스바타 해변의 여자”는 “분홍입술흰뿔소라” 자체일 수도 있고 시인이 그 분홍입술흰뿔소라가 사는 남태평양 뉴칼레도니아에서 만난 여인의 은유일 수도 있다. 물론 앞의 것이 더 맞겠지만, 앞의 더블린에서 만 난 「머랭케잌」의 여인이 “가을”빛을 띠고 있다면 이제 시인은 남태평양에서 “환한” “인사”를 건네는 “분홍입술”을 가진 생명력의 여인을 만나기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이 “분홍입술흰뿔소라”라는 존재에서 시인은 낯섦이나 소외를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두고 온 고향처럼 착할 거 같은 이름”이고, “귀를 대면 바다 얘기 들려줄 거 같은 이름”이며, “부르면 수평선 너머로 누가 올 것 같은 이름”이다. 상실 이전의 존재의 이름, 그것을 가리켜 “분홍입술흰뿔소라”라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시인이 먼 곳에서 만나는 외로운, 개체적인 존재들, 운명처럼 그곳에 피어난 생명적 존재들을 통하여 자기를 회복하려는 은밀한 기도를 인지한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문학평론가) 교수는 “이 시조집은 가람 이병기, 외솔 최현배, 자산 안확 같은 이들의 ‘기행시조’와 확연히 다른 세계라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분홍입술흰뿔소라』는 지금 시대를 대표하는 기행시조집”이라고 해설에서 언급했다. 또한 “이 시조집에서 “필사적”인 “목숨”들에 얽힌 이야기를 이끌어냈지만 수록된 많은 작품들은 시인이 넓은 세계에서 우연히 마주친 외로우면서도 자유로운 존재의 안부들“을 담았고, “새로운 단계의 『분홍입술흰뿔소라』는 그 아름다운 이름만큼 자유롭고 탐스러운 존재들에 훌쩍 더 다가선 ‘신’ 미학의 시조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고 평했다.
그리고 문태준 시인은 “부드럽고 감도 높은 서정의 힘이 느껴”지는 이 시집을 읽노라면 “기억의 잔양(殘陽)을 바라보는, 뒤척이는 옛 숨결을 듣는 시인의 예민한 시안(詩眼)을 주목하게 된다”며 “이국의 땅에서도 시심(詩心)을 탑처럼 쌓아 올릴 수 있다니 놀랍다”고 평가했다.
독자들이여 어디로, 어떤 여행을 꿈꾸는가. 낯선 여행지에서도 서늘하게 빛나는 이승은의 『분홍입술흰뿔소라』 한 권 챙겨들고 그녀가 읊어주는 시조의 메타포에 한번 빠져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