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곧잘 작가(텍스트)와 독자 사이에서 손을 잡고 있는 모습으로 나 자신을 그려보곤 한다. 텍스트를 유심히 보고 성실하게 해석하며, 난삽하지 않은 문장과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글의 구조로 대화를 이끌어 내는 비평가를 꿈꾼다. 진실은 누군가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울리는 파열음과 공명음 안에 있음을 신뢰한다.
그리하여 나는 당신과의 대화 과정이 곧 삶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다. 나와 다른 시간 속에서, 다른 공간 위에서 이 문장을 응시할 당신을 의식하는 중이다. 부재하는 당신의 존재가 나를 늘 백지 위로 초대한다. 고독과 환멸을 기꺼이 견디며 무언가 다시 말할 수 있는 용기가 당신으로부터 나에게 도착한다.
문장에서 피돌기가 시작된다.
_저자 서문 「진입로에서 - 미완인 삶과 대화라는 꿈」 중에서
이 책의 저자는 2010년대에 비평 활동을 시작하며 ‘이질적인 존재들이 개성과 고유성을 간직한 채로 어떻게 유대를 이룰 수 있는가’에 관한 첫 글을 썼다. 그것을 압축해 자신이 바라는 이상적 관계에 ‘원심성의 공동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그로부터 파생된 타자, 대화, 사랑, 혐오 등의 키워드가, 그가 내내 2010년대와 2020년대 문학을 읽는 키워드가 되었다. 그는 그것을 ‘(타자와의) 대화’라는 말로 압축하기도 한다. 그것이야말로 그가 삶과 사람과 문학을 사랑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 진열된 모든 글은 주제상으로도 형식상으로도 그 사랑의 표현과 관련이 있다. 첫 번째에서 네 번째 장까지는, 고독이 만연해진 시대에 ‘혼자’를 ‘혼자들’로 서게 하는 시에 관한 이야기를 누벼냈다. 다섯 번째 장에 수록된 글들은, ‘우리’의 시 읽는 밤이 영원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가만히 건넨다.
이렇게 다시 적을 수도 있겠다. 가파르게 기울어진 세계 위의 존재들을 사랑하는 시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었고, 그 사랑을 다시 독자를 향해 건네고 싶었기에 저자는 이 책에 이와 같은 제목을 남긴 것이다. ‘비로소 사랑하는 자들의 노래가 깨어나면.’
[책 속으로]
이즈음의 서정은 그리하여 실존에의 증명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증언이라는 두 좌표 중 어느 것도 간과할 수 없는데, 다행이라면 비대해진 감각이 양쪽을 위한 유력한 도구라는 사실이다. 고통스러운 사실을 기록해야 하는 것은 역사의 일이었고 고통의 느낌을 보관하는 것은 문학의 몫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고통을 고통답게 복원하는 것은 뒤의 것에 가까웠다. --- p.47
꽃으로 시절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반복될 패배에 이 시절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의 아름다움이 있다. 많이 쓴다는 사실만으로 진정성을 논할 수는 없다 해도 거듭 쓰려는 마음만은 진심인 것이다. 어둠이 언제 걷힐지 모른다지만 시인들은 다시 꽃을 피워 달라. 그래야 우리가 달빛을 꿈꾼다. --- p.79
소설을 읽는 일에는 시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서사는 독자를 느릿느릿 걷게 하고 꼭 그 시간 동안 특정한 삶의 양상을 비판적으로 그들 뇌리에 영사합니다. 그러면 읽는 이는 하릴없이 이성을 도구 삼아 과거를 들춰보거나 미래를 더듬어 볼 것입니다.
반면 시는, 순간을 파고듭니다. 갑자기 명치를 파고드는 통증처럼 짧고 강력하게. 논리가 아니라 감정의 영역을 공격 대상으로 삼는 서정은 종종 좀처럼 열리지 않는 어떤 마음에마저 부지불식간에 침범할 수 있습니다. 잘 있냐고, 괜찮은 것이냐고, 잃어버린 것은 없냐고 ‘마음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것은 따가우나 따스한 인사입니다. --- p.109~110
누구에게나 참혹한 순간이 예외 없이 있다는 진실을 어루만질 만한. 슬픔을 벽 삼은 밀실 안에 자기를 유폐시키는 누군가마저 밖으로 불러낼 만한. 고통을 가열하게 견디는 존재들 쪽으로 계속 향하는 것이 그 시의 몫. 중력마저 앗아가는 무기력을 거스르며 내일 쪽으로 발을 옮기는 모든 여린 존재들의 뒤를 시가 따라 걷지. 비틀거리며 춤추며 노래하며. --- p.219
눈 소식은 아직인가 보다. 그래도 이즈음처럼 바람이 냉기의 날을 잔뜩 벼리고 달려들면 문득 어떤 순간을 기다려보곤 한다. 이를테면 누군가를 고통스럽지 않게 할 정도로만 소복하게 쌓인 눈이, 익히 알던 풍경을 시야에서 거두어 가버리는 날. 이날의 눈이란 세계를 부수고 다시 세우는 건축가를 닮았다. 그가 강렬한 백색의 마술로 세상의 모든 위계마저 눈 속에서 숨을 죽이게 하면, 그제야 익숙함의 속박에서 풀려난 세계가 ‘실은 내가 이렇게나 아름다웠다’라는 주장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느꼈던 먹먹한 놀라움은 잘 잊히지가 않는다. 시 읽는 일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 p.283
가없이 길고 어두운 숲을 급히 통과하려던 사람은 결국 출구에 도착했을까. 숲의 한가운데 이르러 그의 동행인이 제 영혼을 기다리기로 했을 때 그는 아무래도 선택을 해야 했을 것이다. 흐르는 시간에 등 떠밀려 혼자라도 숲의 끝으로 향할지, 혹은 동행인의 그 쓸모없는 시간에 발을 들일지. 이 이야기의 끝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만일 후자를 택했다면, 최소한 그는 자신의 숨 가쁜 생활을 잠시나마 정박시키고 곁에 앉은 동행인의 주름진 얼굴과 거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으리라. 그리고 이 사소한 순간이 그를 구원해 주는 어떤 날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 p.349~3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