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는 진주조개처럼 삶의 고단함, 못마땅함, 고통, 쓸쓸함, 작은 기쁨들을 모아서 보석의 언어를 한 알 한 알 만들어내는 천생의 시인이다. _ursora
아름다움을 버리고 돌아온 우리들의 ‘언니’
삶의 핵심을 건드리는 언어
그의 시 세계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을 만큼 다채롭고, 서정과 풍자가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때로 서로를 보완하고 때로 서로를 밀어내며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자기 앞의 생을 뜨겁게 응시하며 진실을 추구하는 정신, 화장기가 없던 그의 시에도 변화가 찾아와 「팜므 파탈의 회고」에서 시인은 새로운 형식 실험을 하며 치명적인 여인의 마스크를 쓰고 사막을 걷는다.
내가 칼을
다 뽑지도 않았는데
그는 쓰러졌다
그 스스로
무너진 거다
Revenge is a dish
unlike pizza
best served in cold
〈〈World Soccer〉〉 잡지에서 오려낸
이탈리아 속담을 오래도록 물고 다녔다
단맛이 없어질 때까지
FC 바르셀로나가 리그 하위 팀에 패한 뒤
감독이 경질되었고,
나는 뜨거운 사막을 걸었다
모래에 파묻힌
칼날이 반짝였다
나를 노리고 있었다
오아시스 호텔에서 수영을 즐기고
수박 주스를 마시고
지루한 소문이 귀걸이처럼 달린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나갔다
_「팜므 파탈의 회고」 전문
칼, 피자, 축구, 사막, 모래, 칼날, 귀걸이, 드레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언어와 이미지의 향연이 눈부시다. “복수는 피자와는 달리 차가운 접시에 담겨야 제 맛이다”라는 이탈리아 속담을 도입해 독자들을 ‘낯설게’ 만든 2연을 지나, 언뜻 시와 연관 없어 보이는 축구를 삽입해 심리적 충격을 주는가 하면, 뜨거운 사막을 걷는 여인과 섬뜩한 칼날의 이미지를 병치해 긴장을 고조시켰다. 자신을 겨누는 칼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태연히 호텔에서 수영을 즐기며 수박주스를 마시고 드레스를 입고 파티에 나가는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이토록 근사하게 강렬하게 표현하다니. 최영미의 시는 단순하고 명쾌하지만은 않다는 걸 보여주려는 듯 은유와 상징이 풍부한 걸작이다. 지극히 사적이면서도 사회적인 언어로 그는 누구도 가보지 못한 세계를 큐비즘의 작품처럼 인상적이고 생생하게 재현하는데 성공했다.
「방금 쓴 시」 「짚신도 짝이 있다」에서도 의표를 찌르는 날렵한 유머와 통찰이 이어져 잠시 지루할 틈도 주지 않는다. 첨예한 시대인식을 보여주는 「정치인」 「돼지의 죽음」 등 풍자시들이 3부에 묶여있다.
5천만의 국민을 감히 사랑한다고
떠드는 자들
사랑을 말하며
너는 숨도 쉬지 않니?
조찬과 오찬과 만찬에 참석해
축하하고 격려하고 약속하고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보여주지 않고
왼손이 하는 일은 반드시 오른손이 알게 하고(…)
고통을 말하며
너는 어쩜 그렇게 편안할 수 있니?
_「정치인」 부분
“정치인들을 더 나아가 국민을 깨우치는 시집” (인터넷 교보문고에 올라온 독자의 리뷰) 우리의 착잡한 현실을 비추는 거울 같은 그의 비판은 풍자에만 머물지 않고 더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있다.
“세상을 바꾸는 건 풍자가 아니라 사랑이야”
_「편집회의」 부분
4부에는 삶에 대한 사색이 두드러지는 시들이 묶였다. 인생의 역사, 정직한 생활 감정을 담은 조용한 이런 시는 어떤가.
창밖의 비를 맞으며
청춘도 중년도 흘려보내고
나를 차지하려고
그렇게들 덤비더니
폭풍우 속을,
나 혼자 가는구나
_「탄식」 부분
세대와 성별을 뛰어넘어 사랑받는 최영미의 시는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2006년 이수문학상 심사위원인 유종호 교수는 “최영미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 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 이유를 구현한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힌 바 있다. 카메라의 렌즈처럼 정확한 눈으로 세상과 자신을 응시하며 그의 시는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쉽게 위로와 희망을 말하지 않지만, 최영미의 시는 우리를 일상의 감옥에서 해방시키는 묘한 매력과 치유력이 있다. 거짓 없는 시, 진정성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