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어 “골아보카”는 “말해볼까”라는 뜻의 제주어입니다.
“76주기 제주4ㆍ3을 추모하며”
교묘하고 강퍅한 정치 세력이 피우는 법석에 의해 역사에 대한 망각을 강요당하는 오늘, 한국의 많은 시민들에게 “예전 사람들을 맴돌던 바람 한 줄기”를 다시 불러오는 일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한 움직임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많은 일은 우리가 이루고자 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그 바람 한 줄기에 우리가 휩쓸림으로써 벌어지는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제각기 70여 년 전 과거의 바람 한 줄기가 남긴 흔적일 뿐이지만, 그것이 참혹한 기억을 들추어내거나 잃어버린 어떤 신화를 복구하기보다는 머지않은 미래에 좀 더 분방한 상상력으로 피어날 씨앗이 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제주4ㆍ3 76주기를 추념하며 감히 모아 내어놓습니다.
문집 첫머리에 놓인 문학회 회원 아홉 명의 4·3 체험을 풀어 놓은 특별기획 「제주4·3과 나」는 제각각 어떤 사연으로 제주4·3이라는 벅찬 역사적 사건을 마주 대할 결심을 하고 그것을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 그려내고 있는지 진솔하게 보여 줍니다.
회원들의 창작품으로는 열한 편의 시와 단편동화, 그리고 에세이를 실었습니다. 시와 동화는 제주에 관한 아름답고 슬픈 추억, 제주4·3의 참혹한 진상과 그 여파를 간직하려는 안간힘을 보여 주며, 강요배 화백의 그림을 다룬 에세이는 제주에 관한 모든 기억의 배경을 이루는, 지울 수 없는 바람의 흔적을 다루고 있습니다. 제주4·3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역사 현장을 찾아 쓴 기행문은 감당하기 어려운 역사적 책무를 떠맡은 군인들의 실존적 선택에 관한 물음을 던집니다. 제주4·3뿐만 아니라 역사, 기억, 제주도, 트라우마 등을 다루는 픽션 및 논픽션 작품을 함께 읽으며 느낀 감상을 「북 리뷰」 섹션에 다섯 편의 독후감으로 실었습니다. 「독서 토론」 섹션에는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와 시바 료타로의 『탐라기행』을 읽고 회원들이 나눈 대화가 실려 있습니다. 정지아의 소설은 시대와 불화했던 빨치산 세대 부모의 삶을 돌아보는 작가의 애정 어린 시선과 발랄한 언어에 주목하게 하였고, 시바 료타로의 기행문은 일본 지식인의 눈으로 보는 한국의 역사와 제주의 문화에 대하여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 주었습니다.
「특별 인터뷰」 형식으로 장편 서사시 『한라산』의 작가 이산하 시인의 근황과 목소리를 전합니다. 「제주4.3과 사람들」 섹션에는 제주4·3 희생자 유족 문광호 선생이 들려주는 제주4·3의 상흔을 에세이 형식으로 기록하고, 재일 제주인들의 삶에 대한 사회학적 연구를 통해 제주4·3의 진실을 기록으로 남긴 고(故) 고선휘 교수와 그녀의 유지를 잇고 있는 남동생 고휘창의 이야기를 실었습니다. 책의 말미에 덧붙인 두 편의 이야기는 2023년 11월 12일, 대학로 한예극장에서 (사)제주4·3범국민위원회가 주최하고 정준희, 주진오, 전우용 선생이 참여한 토크 콘서트 ‘4·3 역사 콘서트: 역사 부정과의 전쟁, 그리고 4·3’ 중 제주4·3과 역사 왜곡에 관한 부분을 중심으로 정리하여 실었으며, 1993년 『신동아』 논픽션 공모 최우수작으로 제주4·3 시기 민족청년단(족청) 활동을 하다 우익 대동청년단과 경찰에게 고초를 당한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한 고(故) 장동석 선생의 글 「수난의 족청 시절」을 유족의 허락을 받아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