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자를 만났는데, 미리 정하지도 않은 화제의 ‘런던 베이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저자는 ‘베이글’은 유럽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에서 자리 잡은 음식문화며, 실제 런던에서 ‘베이글’을 맛보기 힘들다 말했다. 평일에도 장사진 치는 대한민국의 ‘런던 베이글’에는 사실 ‘런던’은 장식에 불과하다. 하지만 ‘런던 베이글’이라는 단어에서 ‘베이글’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단어는 틀림없이 ‘런던’이 분명하다. ‘런던’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은 그렇게 실재한다. 서문에서 밝힌 한국 사람은 영국을 잘 모른다는 저자의 판단이 이 원고와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라는 책의 탄생이유다. 그리고 런던이란 나라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영국을 상징하는 왕실과 정치는 오랜 전통 속에서 민주주의를 꽃피운 인류의 중대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영국·영국인 이야기 결정판의 첫 소재로 ‘왕정과 정치’를 삼는 것은 어려운 결정이 아닌 이유다.
영국 정치를 지탱하는 힘은 무엇인가?
영국의 여왕과 아들 그의 전처였던 다이애나 비, 그 아들 찰스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영국인이 가지는 지대한 관심은 이해하기 힘든 과한 것이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어떤 넘지 않는 선이 있다는 걸 이 책의 많은 왕가 이야기 속에서 읽을 수 있다. 이는 영국 정치인에 대한 질릴만한 가혹한 검증이나 결과에 대한 매서운 책임 추궁과 완전히 다르다. 국민에게 비난받지만, 될 수만 있다면 온몸을 불사르는 의원의 처우는 어떤가? 좁은 사무실에서 의원은 직접 운전을 하고, 매주 지역구에서 민원을 듣지 않는다면 재선이 불가한 선거 지형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만약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에게 이러한 예우가 주어진다면 자신에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사람들이 이토록 국회의원을 되고 싶어 할까? 이는 정치를 대하는 정치인의 기본적인 마음과 희생정신을 통해 드러난다. 그러한 정치 문화가 자리 잡는 데는 용기 있는 리더의 결단과 긴 시간이 필요했다. 국민의 신뢰는 그렇게 자리 잡은 것이다.
문제는 같으나 해결책은 다른 영국 사회의 쟁점들
오늘날 영국 사회 역시 세계화의 흐름 속에서 놓여있다. 당장 EU와의 관계, 미국의 금리 정책이나, 곳곳의 국지전 영향으로 벌어지는 물류대란, 중동의 불안한 정세와 급락을 거듭하는 유가의 영향까지 영국 내의 정치적 순화 작용만으로 안정을 추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치나 언론에서 연일 터지는 사건도 이러한 추세 속에서 등장하는 불가피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여러 게이트와 스캔들이 터진다. 어떤 경우는 현재의 우리가 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말도 안 되는 잔혹한 사건이 많다. 이러한 뉴스를 접하는 영국의 국민 그리고 언론과 정치인은 어떤 결론을 내릴까. 요약하면 단호함은 가히 ‘쾌도난마의 결단’이라고 하겠다. 얼마나 큰 권력이라도, 얼마나 긴 기간 국민의 신뢰를 얻었다고 해도 엄혹한 판단을 비켜 갈 수는 없다. 각광받는 정치인 누구, 절대적 언론인이나, BBC와 같이 국민적 사랑을 받았던 공영 방송사도 그 판관의 무거운 결정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영국·영국인 이야기 결정판
작가 권석하는 한국에서는 아득히 먼 곳 영국에서 40년을 넘게 살아왔다. 그의 삶을 이방인으로 명명함은 아주 당연하다. 낯설고 이질적인 풍경 속에서 그를 지탱하게 했던 힘은 어쩌면 나고 자란 고향이었다. 당연히 그는 오랫동안 살아왔던 한국인의 눈에 비치는 영국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그 글은 한국의 언론 매체를 통해서 발표됐다. 외로운 재영 저널리스트의 나이도 고희를 넘겼다. 작가와 출판사는 이런 세월을 고려하여 작가의 영국·영국인 이야기 결정판을 만들기로 나섰으며, 그 첫 번째 편으로 ≪여왕은 떠나고 총리는 바뀐다≫를 출판한다. 이는 영국의 왕실, 정치, 경제, 역사, 사회, 문화, 예술을 체계적으로 분리 편집해서 독자의 편리를 제공하려는 출판사의 의도에 저자가 동의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40년이라면 어쩌면 아득한 시간이다. ‘가장 많이’는 아닐지라도, ‘가장 깊이’ 영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느꼈던 저자의 경이와 비감이 공존하는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물리적 시간을 거슬러 영국의 빛과 그림자를 만날 수 있으며,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