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정한 일상에 비상벨을 달아주는 마음들
애써 말하지 않아도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
서른일곱의 "마은"은 하고많은 일 중에서 왜 하필 장사냐는 엄마 "지화 씨"의 물음에 먹고살 게 없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이혼한 남편 공가철 씨의 빚쟁이들로 득실대던 서울을 벗어나 이제 막 연고도 없는 울산에 반찬가게를 차린 지화 씨가 보기에 모아둔 돈도, 내세울 만한 경력도 없는 딸의 처지는 딱하기만 하다. 그런 엄마의 마음을 모를 리가 없는 마은은 고시원과 다를 바 없는 리빙텔마저 정리하고 당분간은 가게에서 먹고자야 한다는 자신의 처지는 끝끝내 숨긴다. 이십대를 투신했던 연극판과 마지막 직장이었던 학원은 그만두면 돌아설 수 있었지만, 이곳 "마은의 가게"는 답답한 일을 눈감고 모른 척할 수도, 가게만 두고 멀리 도망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는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쉬는 날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서도 마은은 자신의 최선이 자꾸만 부족하게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우연히 마은의 가게를 찾은 "보영"의 눈에는 본인도 이제 막 카페를 열었으면서 다른 카페의 안위를 걱정하고, 다른 곳에서 납품받아도 될 법한 디저트 하나까지도 직접 만든 것만 고수하는 여사장 마은이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보영은 낯선 자신의 끼니를 챙기는 마은의 다정함과 카페에서 찐감자를 팔고 싶다고 말하는 엉뚱함에 차츰 마음을 열게 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하루에 안부를 묻기 시작하면서 점차 가까워진다.
“혹시 저녁 먹었어요?”
“아니요.”
“나랑 컵라면 먹을래요? 오늘은 손님 안 올 가능성이 커서요. 작은 숲도 일찍 닫았고.”
“작은 숲이 닫았으니까 여기로 올 수도 있죠.”
내 말에 마은 사장은 멈칫하더니 말했다.
“그럼 맞은편 편의점에서 먹을래요? 손님이 오는지 지켜볼 수 있으니까.” (p. 104)
마은은 단골손님 보영뿐만 아니라 손님이 뜸한 시각이면 찾아와 긴 수다를 늘어놓는 옆 가게 꽃집 사장 채영 씨,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은의 끼니부터 챙겼던 카페 사장 솔이 씨, 고시원에서부터 끊임없이 무언가를 나누어 주려 했던 정미 언니까지 혼자 카페를 운영하는 자신에게 비상벨을 꼭 달아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는 친구들의 마음에 기대어 차근차근 가게를 일구어나간다. 각자 하는 일도 살아가는 방식도 제각각인 인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불안을 나누면서도 상대에 대해 캐묻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은 옆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감각하게 만든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신들의 우정을 과시하거나 따로 시간을 내어 무언가를 하려 애쓰지 않는다.
『마은의 가게』가 보여주고자 하는 사랑과 연대는 뜻을 하나로 모으는 일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서로의 존재를 오롯이 받아들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마은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보영의 남자친구 주호로 인해 자신의 일상에 균열이 생기고 마음에 생채기가 남게 된 순간에도 외려 보영에게 “누군가를 믿지 못하게 되지 않았으면 좋겠”(p. 219)다고 말한다. 마치 우리의 일상을 무너뜨리는 것이 "집"이 아닌 "방"이라 부르는 고시원에서의 생활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친구의 낯선 모습도 아닌 바로 내가 아닌 타인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처럼. 이렇듯 누군가가 던진 돌이 마은과 보영의 일상을 잠시간 불안하게 만들 순 있어도 그들의 관계를 끝끝내 허물어뜨릴 수 없다는 점 역시 삶의 고단함을 정면으로 응시하되 단 한 명의 일상도 함부로 결론 짓지 않는 이서수 소설의 미덕을 보여준다.
우리의 삶이 결코 혼자일 수 없다는 사실은
이서수의 소설을 반드시 환한 곳으로 나아가게 한다
“나는 내 딸을 지킬 거라고.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나한테 연락하지 말고 너한테도 연락하지 말라고. 한 번만 더 연락하면, 칼 들고 가서 배를 찔러버릴 거라고.”
“……설마 재후 얘기야?”
“그래.”
“엄마가 그랬다고?”
“그래…… 엄마 착하고 순한 사람이 아니야. 너희 아버지가 나보고 착하고 순한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속상했는지 아니. 얼마나 펑펑 울었는지 알아? 나는 착하고 순한 사람 아니야. 그런 사람으로 안 살아.” (p. 239)
시도 때도 없이 "마은의 가게" 앞을 배회하는 강봉호와 동네 홍반장을 자처하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변일구. 불 꺼진 가게 앞에서 담배를 태우고 지나가는 낯선 이의 그림자까지. 가게가 곧 집터이자 일터인 마은의 일상은 “출입문 손잡이에 노끈을 칭칭 감은 뒤 테이블 다리에 연결해 묶”(p. 110)고 나서야 비로소 잠깐 눈을 붙일 수 있을 정도로 불안하기만 하다. 자신을 괴롭게 만든 학원 아이들보다 더 잔인했던 원장과 마은의 상처를 무기로 겁박했던 전 애인 재후가 한 말들 역시 깨지지 않는 악몽처럼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마은을 속절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다 스스로에게서 문제점을 발견하려 하는 자기 자신이다. 마은에게 인간관계는 어릴 때 다락방에서 들었던 귀신 소리처럼 영영 혼자만이 감당해야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마은과 엄마의 든든한 버팀목이지만 정작 본인은 살아가는 내내 자신과 불화했던 경화 이모의 고백을 통해 마은은 그 기나긴 시간을 빠져나온 게 결코 혼자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경화 이모가 자신을 괴롭힌 학원 아이들을 찾아갔었다는 것과 재후의 증발이 엄마 지화 씨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 시간 속에서도 우리가 서로를 돌보며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 더는 타인을 향한 의심을 거두기가 어렵다는 보영의 말에 그럼에도 믿음을 저버려선 안 된다는 마은의 말은 엄마 지화 씨의 강인함과 경화 이모의 연약함 그리고 친구들의 사랑과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살아가며 또다시 번복해서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믿음에 관하여 말하는 『마은의 가게』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던 사랑과 연대의 장이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