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오랜만에 큰 그림의 시들을 만났다. 정수자의 시들은 메시지에 사로잡혀 절절매지도 않고 표현을 궁구하느라 겉멋을 부리지도 않는다. 그녀는 대상을 넉넉히 껴안고도 남을 언어의 거대한 그물을 세계에 던진다. 그것은 클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섬세하고, 완결을 지향하면서 완결을 의심하는, 완성과 회의의 탄탄한 그물이다. 그것은 확고한 중심을 견지하면서 대상을 향하여 아름다운 비례의 날개를 던진다. 그것이 사물을 포착할 때, 가장 잘 들어맞는 것들끼리 부딪힐 때만 낼 수 있는 경쾌한 소리가 들린다. 어떤 ‘삑사리’도 허락하지 않는 그녀의 정확한 투구는 비례의 왕국에 도달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고전적 기술이다. 그러나 그녀는 도달의 순간에 자신을 지울 줄도 안다. 압력이 가장 높은 단계에서 폭발하는 별처럼, 가장 완벽한 순간에 언뜻 시야에서 사라지는 별똥별처럼, 그녀의 언어는 폭발하면서 동시에 여백을 만든다. 폭발하는 별들의 뒤란이야말로 그녀의 시적 여백이 만들어내는 고요한 풍경이다. 폭발하는 별들의 뒤란은 아름다운 빛의 여운과 조용한 성찰과 새로운 길에 대한 탐구가 동시에 일어나는 공간이다.
정수자의 시들이 폭발할 때, 독자들은 그 절대적인 아름다움에 환호한다. 그 뒤란에서 부재와 해체의 고요한 성찰이 이어질 때, 독자들은 자성의 시간에 빠져든다. 작은 힘들이 모이고 모여 어느 순간 손끝으로 에너지가 폭발할 때, 몸은 춤이 된다. 그녀의 시들은 축적된 에너지의 폭발과 해체, 힘의 모음과 놓음 속에서 마침내 춤이 된 언어이다. 발끝에서 치고 올라 적삼을 타고 흐르다 마침내 손끝에서 폭발하는 춤사위처럼 그녀의 언어는 지고한 완성을 향해 있다. 그러나 그녀의 언어는 완성의 순간에 허공을 만지는 손끝처럼, 축적된 에너지를 저절로 소진의 상태에 이르게 한다. 그것은 완성의 욕심에 대한 자성이면서 완성의 완성성에 대한 회의이고 사태 후에나 만날 수 있는 고요한 뒷자리이다.
보았는가, 저 꼼질은 틀림없는 물이렷다
다가서면 스러지는 모래 노래 아니라
사막 속 윤슬을 켜는 신의 미소 같은 것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대는 물비늘들
가히 홀린 눈썹을 술대 삼는 신기루에
다저녁 물때를 놓치듯 버스도 지나칠 뻔!
잡아보려 다가서면 고만큼씩 멀어지던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에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을 탐했네
- 「윤슬 농현」 전문
이 시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취 중의 하나인 이 작품을 보라. 시인은 사막에서 바람에 따라 흐르는 모래의 움직임을 물의 윤슬로 읽는다. 그것은 마치 시신을 어르고 달래 살려내는 마법사의 행위 같다. 죽음의 마당엔 “율”을 이룰 악기의 현도 없다. 사막의 윤슬이라는 모순 형용 속에서 생명의 “물비늘들”은 마치 “무현無絃의 농현弄絃처럼 사물”댄다. 현이 없는 곳에서 현을 가지고 놀다니. 죽음에서 생명을 길어 올리는 작업은 무언가에 홀리지 않고는, 미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의 마당에서 생명의 움직임을 읽는 것은 오로지 “홀린 눈썹”을 가진 자에게만 가능하다. 그러나 홀린 자가 자신을 홀린 대상을 향해 다가갈 때 그것은 자꾸 멀어진다. 이 다가섬과 멀어짐의 “사막 속 윤슬” 어딘가에 삶의 닻들이 내려져 있다. 이 아름다운 착각이 삶이다. 시인은 이 착시의 과정을 절정에 이르는 춤사위처럼 접었다 펴고 폈다 접으며 그려낸다. 마침내 그 절정에서 시인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을 때, 이 착각은 다름 아닌 시 쓰기의 과정으로 전치된다. 결국 시적 화자는 “시라는 술래 같은 아지랑이 멀미 속”에서 헤맨 것이다. 이 마지막 진술 속에서 모든 신기루는 해체되고, 그 폐허의 뒤란에서 엄밀한 진실이 반짝인다. 시인이 하는 일은 바로 “줄 없는 거문고 타듯 물의 율을 탐”하는 것이다. 시인의 작업이 독특한 것은 사막 속에서도 “물의 율”을 찾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 오민석(문학평론가·단국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