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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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소설의 주가 되는 「금강경」은 대략 서기전 1세기에서 서기 1세기에 성립된 공(空)사상의 기초가 되는 반야경전이다. 공사상을 설명하면서도 공 자를 쓰지 않는 특이한 경전의 원명은 「금강반야바라밀경」이다. 인도 사위국 배경으로 석가모니 붓다께서 제자 수부티를 상대로 설한 경이다.
그 요지를 살펴보면 이렇다.
● 집착하여 마음을 내지 말고 머무르지 않는 마음을 일으켜라.
● 붓다를 모양으로 보지 말고 모양이 없는 진리로서 붓다를 깨달아야 한다.
● 모든 모습은 모양이 없으며 그렇게 본다면 곧 진리인 붓다를 보게 된다.
특히 다음과 같은 구절 속에 「금강경」의 요지가 잘 드러나 있다.
●‘만약 모든 현상이 진실상이 아닌 줄을 알면 곧 여래를 보리라(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보살의 수레를 일으켜 나아가려는 자를 위한다고 이름할 얼마간의 법도 존재하지 않는다(無有少法名為發趣菩薩乘者)’
2
본 원고를 출판사가 선택한 이유는 분명하다. 「금강경」을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이 전무하다시피 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다. 사실 「금강경」이 소설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편집진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설이 완성되었다고 하니까 어떻게 썼을지 궁금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편집부의 시선을 끈 것은 지금까지 나온 「금강경」과는 쾌를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뜻있는 이들이 하나같이 판에 박은 듯「금강경」을 해석하여 내놓는 마당에 그와 쾌를 같이 한다면 책을 낼 의미가 없었다. 「금강경」의 전문을 들여놓고 어귀나 푼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타의 해설서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 핵심에 다가들 수 없다면 도를 빙자한 잡화(雜話)와 다를 바 없다.
먼저 소설을 읽고 느낀 점을 들어보면, 첫째, 종래의 「금강경」에 대한 해석서들이 무비판적인 데 반해 이 소설은 악승(惡僧)의 시선을 통해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 둘째, 악승과 악비의 만남을 통해 구도의 문제를 상사(想思)의 영역으로 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독성이 강한 꽃무릇을 통해 구도 문제를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며 그들에 의해 「금강경」의 묘의가 드러나고 있다. 셋째, 이 소설이 반드시 하고 넘어가야 할 대답을 악승 데바와 악비 천상일녀의 의식의 전환에서 찾고 있다. 넷째, 버림에서 만남의 법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불조의 시살. 이는 혁명이다. 버리지 않고 어떻게 그 본질을 볼 수 있겠는가. 진리가 말이 될 때 진리는 이미 진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진리라고 말하는 현상의 목을 쳐없애야 한다. 그때 진리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합장하던 대상이 현상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시살하려는 데바의 신심. 그 속에 궁극의 해답이 있다.
최종 보고서 내용.
작가는 잃어버린 본성을 찾아내는 방법을 십우도란 작품에서 보여준 바 있다. 십우도가 무엇인가? 잃어버린 본성을 어떻게 찾아올 것인가를 묻는 시심마다.
작가에게 물었다.
-소설 금강경의 요의를 한 마디로 말씀해 주시지요?
-황금 동전을 연못에 빠뜨렸습니다. 그걸 건지려면 헤엄을 배워야지요. 여래를 찾는다고 여래는 오지 않습니다. 여래가 오지 않듯이 동전 스스로 떠오를 리 만무합니다.
-여래가 없다는 말씀인가요?
-여래가 오리라고 누구나 믿고 있지요. 여래가 와 헤엄을 가르쳤는데도 헤엄을 배울 생각은 않고 우리는 여래를 기다립니다. 여래는 오지 않습니다. 왜 오지 않을까요? 우리가 여래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여래를 죽이다니요?
-진리가 현상일 때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래는 말했지요. 모든 현상이 진리가 아님을 알 때 여래를 보리라. 여래는 그대로의 존재입니다. 여래는 길가 풀잎일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눈물일 수 있고, 그대를 흔드는 바람일 수 있고 밤하늘의 별일 수 있습니다. 여래를 만나려면 나의 불성(佛性)에 불을 댕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여래를 만나는 길이지요. 여래가 오지 않음을 알 때 여래와의 참만남이 시작되는 이치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니 수많은 중생이 오늘도 여래를 죽이고 있는 것입니다.
말할 나위 없이 작품 속 황금 동전의 비유와 불조의 시살은 이 작품의 정점이다. 대오(大悟)는 체험이며 오직 체험으로써 근원적 자유를 직시한다. 그러므로 자연스럽게 비어 있는 세계가 수반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의 백미는 데바의 의식 전환에 있다고 봐야 한다. 패종 데바와 악비 천상일녀와의 지독한 상사(想思). 그 속에 보이는 의식의 전환. 그 전환을 통한 「금강경」의 묘의. 지해(知解)가 아닌 지혜(智慧)를 얻어내려는 대승심. 그것이 곧 붓다요 금강임을 이 소설은 형상화하고 있다.
금강경이 어귀나 풀어 놓는다고 해서 소설이 될 수는 없으며 완전한 이해, 완전한 통찰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탄허 큰스님의 소설 「천하의 지식인이여, 내게 와서 물으라」에 이어 백금남 작가의 두 번째 소설이 그렇게 결정됐다.
책을 출간하기로 하고 만들어 나가던 중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작가가 패종을 등장시켜 「금강경」의 묘의를 드러내는 의도는 알겠지만 「데바의 시선」이란 제목이 낯설게 느껴지고 그래서 먹히겠느냐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초심을 잃고 욕심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대안으로 떠오른 제목이 「소설 금강경」이었다.
작가 선생님에게 어렵게 말씀드렸는데 생각대로였다.
-「데바의 시선」이 맞습니다. 비판적 시선으로 「금강경」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길 잃은 소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금강경」은 아름답고 강하지만 그 본뜻을 비판적으로 캐보지 않고서는 붓다를 눈금만큼도 바로 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소설 금강경」 하면 한눈에 간파도 되고…. 더욱이 「금강경」이 석가모니 붓다의 말씀이 아니라는 말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 시절의 데바는….
석가모니 붓다가 「금강경」을 설하지 않았다면 작품의 주인공인 데바는 어떻게 되느냐는 속 좁은 질문이었다.
작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그래서 자서에 쓸 생각입니다만 조금 더 깊이 들어가야 할 듯합니다. 붓다가 「금강경」을 설하던 시대는 문자가 없던 시대였습니다. 문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특정 지역에 한해서겠지요. 그러므로 붓다의 말씀은 암송을 통해 전해지다가 나중 문자화되었지요. 세월이 흘러 붓다의 말씀이 문자화될 때쯤에는 대승불교가 일어나 불성을 깨달으면 누구나 붓다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 팽배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보살 사상이 생겨났고 경전에도 그런 점이 스며든 것이라고 봅니다. 비근한 예로 「반야심경」을 봐도 관세음보살이 나오지요. 붓다가 살아계시던 당시에는 관세음보살이 있을 리 없었지만, 보살 사상이 팽배했으므로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이지요.
그렇게 초심의 배신은 무너지고 말았다. 할 말이 없어져 버린 편집자는 겨우 이런 말이나 했다.
-그러고 보면 데바는 오늘 어떤 시선으로 우리를 보고 있을지 궁금하네요?
-「데바의 시선」으로 보고 있겠지요.
돌아오려는데 선생님이 단안을 내렸다.
-「소설 금강경」으로 가지요. 어려운 「금강경」의 세계를 소설로 풀었다? 그것이 맞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뜻밖이었다.
-그렇죠? 선생님.
-내가 소설 쓰는 사람이라는 걸 깜박했네요.
그렇게 말하고 작가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돌아오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살랑이는 바람에도 흔들리는 나의 신심. 내가 데바인가? 데바가 나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금강경」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씹었다.
흘러가라. 나에게 얽매이지 말고 너에게도 얽매이지 말고 물 같이 흐르다 보면 본래면목을 만나리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