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땅과 죽음의 하늘
우리가 익히 아는 사상가들은 대개 죽음을 긍정할 뿐 아니라 희한하게도 때때로 좋아하기도 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안도로 여겨 고대했고, 삶을 고통으로 여긴 석가모니는 종국적이고 절대적인 절멸을 최고의 선으로 삼았으며, 아우렐리우수를 포함한 스토아 철학자들은 죽음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우주적으로 정당한 자연법칙의 일부로 여겨 사랑했다. 또한 장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 몽테뉴는 철학적 지혜를 죽음의 수용과 동일시했으며, 현대 죽음학의 거장 퀴블러 로스는 죽음을 고치가 나비로 태어나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들이 죽음에 맞서기보다 기꺼이 순응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 이후의 상태가 더 좋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편 평생 죽음이 두려웠던 톨스토이는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온갖 생각의 술책을 썼다. 죽음 이후 전개될 사태에 대해 궁금해서는 안 된다고 종종 주장하면서도, 그와 달리 장자의 호접몽처럼 죽음을 잠(꿈)에서 깨어나는 것, 씨앗이 과일에서 떨어져 대지에서 다시 생명을 얻는 것, 물방울이 대양에 합류하는 것 등으로 비유했다. 그리고 삶은 오직 죽음의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하면서 죽음을 공간, 시간, 분리된 개별 자아 등 물질적 ‘제약들’을 극복하는 수단, 곧 물질주의 셰계관을 논박하는 궁극적 심급으로 삼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삶을 “일정하고 점진적인 자기발견의 과정”으로 규정하고, 노인을 “인류의 도덕적 진보의 소지자”로 여겼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노화와 질병을 도덕적이고 영적인 성숙 과정으로 이론화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우리에게 죽음의 문제는 죽음이라는 사건에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죽는 과정이 포함된다. 죽는 과정도 삶이라고 여긴다면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대상은 우리가 인식하고 느낄 수 있는 죽기까지의 사태이지 죽음 자체가 아니다.
『죽음이 온다 살아야겠다』는 일대기처럼 삶을 살고 죽음을 맞이하는 게 아니라 역순으로 죽음을 생각해보고 삶을 살아보자는 죽음과 삶에 관한 탐구서다. 죽음이라는 문제는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우리의 숙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