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를 함께 여행한 은원, 종로에서 같이 차 마셨던 은원,
그리고 지금 내 앞의 은원이 전부 다른 은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려 해요.’
배달 주문 송장의 물품을 ‘피킹’하는 물류센터 야간 아르바이트로 먹고사는 스물아홉 살 남성 차연. 저녁시간에 구내식당에 가는 대신 직접 싸온 바나나를 까먹으며 휴게실에서 스티븐 킹의 소설을 읽던 그에게 다가온 은원은 한 인터넷쇼핑몰에서 이제 막 팀장으로 일하기 시작한 서른다섯 살 여성이다. 차연이 무심히 건넨 바나나에 은원은 도시락으로, 이후엔 즉석 식품 세트로 화답하며 인연을 이어가던 중, 은원이 자신의 마음 한구석을 점차 잠식해가는 것을 느끼던 차연은 용기를 끌어모아 그녀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한다.
처음 만난 날이 며칠인지, 사귀기로 한 날은 며칠인지, 함께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무엇을 사고 무엇을 먹었는지 하나하나 기억하는 세심한 청년 차연은 머릿속에 서랍장이 있는 듯 정확하다. 그는 과거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미래를 넌지시 보기도 한다.
미래?
8년 뒤. 아니면 9년 뒤. 은원과 나의 미래가 보였어요. 우리가 그곳에 함께 있는 모습이. […] 늦은 겨울이었어요. 2월 말이지만 춥지 않은 날이었어요. 주말이었고, 은원과 내가 익선동 골목을 함께 걷는 중이었어요. 8, 9년 뒤였으니 우리도 그만큼…….
[…] 안 궁금해요. 말하지 말아요. 그런 이야기 무서워. […] 지금은 그냥 지금 이야기만 해요. 그게 제일 좋아.
그런데, 만난 지 600일쯤 되던 때 두 사람이 제주도로 함께 여행을 다녀오고서, 갑자기 은원이 아무 연락도 없이 사라졌다. 은원이 살던 집에는 일상의 흔적이 구석구석 그대로 남아 있고, 은원이 일하던 직장에서는 며칠째 소식이 없다며 근심이 가득하다. 은원의 친구가 일하는 곳을 간신히 되짚어 찾아가지만 낯선 이들에 의해 쫓겨난 차연. 실종수사전담팀 경찰들은 그를 위로한다.
“대한민국은 실종 공화국이에요. […] 천만다행으로, 그들 중 거의 95프로가 일주일 안에 실종해제 처리되곤 해요. 결국은 아무 탈 없이 귀가한다는 의미예요. 세상 모든 실종은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이유를 갖고 있지요. 그러니 너무 걱정 마세요. 제 말씀은, 걱정을 너무 심하게 하지는 마시라는 겁니다.”
그러나 차연은 더 우울해진다. 은원에 대해 아는 것이, 누군가 은원에 대해 물었을 때 대답할 것들이 뜻밖에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은원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고 자신했는데……. 걷잡을 수 없이 우울에 빠져들던 차연에게 갑자기 걸려온 전화 한 통.
“남자친구는 모르죠? 은원이에게 무슨 병이 있는지. […] 베르니크 코스타로프 증후군. 아이고 이름도 어렵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병에 대해 설명하는 은원의 어머니와 고모. 은원에게 어느 날 갑자기 개인 고유의 과거 정보들을 대부분 회상 못 하는 해리성 기억상실증이 발병했는데 이 증상이 1년에 한 번 또는 7~8년에 한 번 예고도 없이 일어난다는 것. 다시 기억을 잃은 은원이 일상을 되찾는 것을 기꺼이 돕겠다고 나선 차연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은원을 다시 만나 두 사람이 함께했던 과거에 대해 하나하나 찬찬히 들려준다. 그렇게 새로운 시간을 쌓아가고, 공유된 추억을 만들어가던 차연에게 별안간 은원의 고모가 다시 찾아와 묻는다.
“은원이가 행복하기를 바라나요. […] 장차 어떠한 경우건, 은원이를 여전히 은원이로서 이해해주고 아껴줄 수 있나요.”
그리고 ‘물론’이라는 차연의 답에 두 연인을 비밀리에 한 장소로 데려간다. 진실이 살아 있는 곳이라는 여의도CL23생명연구소 안에서 ‘출입금지’라고 쓰인 철문이 열리자, 놀라운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타원형 캡슐 세 기 안에 눈 감은 채 누워 있는 알몸의 여인들. 세쌍둥이처럼 똑같은 그들은 은원의 얼굴과 몸을 그대로 지닌 또 다른 은원들이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차연만큼이나 충격에 휩싸여 흐느끼는 은원. 그렇다면 차연과 600일을 함께했던 그 은원과 이 은원은 같은 은원인가? 다른 은원이라면 그 은원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눈앞의 이 은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제 차연의 삶은 또 다른 차원으로 진입한다.
“은원은, 그야말로 세상에 단 한 명뿐인 은원이니까.”
과거·현재·미래를 넘나들며, 사라진 것을 찾아 헤매는 우리 시대 젊음의 초상
『은원, 은, 원』은 잃어버린 사람, 잃어버린 기억,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아 시간을 넘나들며 방황하는 이들의 초상을 보여준다. 복제인간이라는 SF 소재가 이 작품에서는, 우리와 먼 시간 공간이 아닌 바로 지금 이곳에서 현실적으로 펼쳐진다. 잃어버린 것, 사라진 것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것은 혼란과 두려움 가운데 남은 기억의 힘이다. 그 힘으로, 사라진 연인의 빈자리를 버텨내고, 사라진 연인의 흔적을 추적하고, 사라진 연인의 기억이 되살아나도록 격려한다. 끄떡없이 매몰차고 거대한 줄로만 알았던 비가시권의 권력도, 그 휘하의 사람들도 기억의 서사가 불러온 감동의 물결에 휩싸인다. 그리고 유일한 존재라고 믿었던 연인을 실제로 상실했음에도, 다시 관계 그려가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우리가 사랑한 것의 근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